68년 개통 경인고속도...50년간 한국 경제 이끌다
68년 개통 경인고속도...50년간 한국 경제 이끌다
  • 이두 기자
  • 승인 2017.11.2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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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천IC~인천 종점 일반화돼 공원 주차장 등 조성, 10여개 출입로 만들어져
경인고속도로 인천구간이 일반도로화되고 나머지는 지화화가 추진된다. 사진은 경인고속도 목동 부근 진입로.

50년전 서울~인천 40분에… 한국 산업화를 이끌다
새 시대를 알렸던 교통혁명… 인천구간 일반도로로
공사 당시 황소까지 동원하고 얼지 말라고 비닐씌워

1967년 5월 27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경인고속도로 기공식이 거행됐다. 인천시민 3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정일권 국무총리가 기공식 치사를 읽었다.
경인고속도로가 생기기전 서울~인천을 오가는 도로는 경인국도가 유일했다. 서울에서 용산을 거쳐 한강대교를 지나 노량진 영등포 오류동 소사(현재 부천) 부평 주안 제물포 동인천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국가 부흥을 외쳤다. 그 중의 하나가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박대통령은 1964년 서독을 방문해 고속도로인 아우토반 시속 160㎞로 달려보고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독일 고속도로를 달려본 박대통령은 “도로혁명 없이 산업혁명 없다”는 그만의 경제관을 갖게 된다.
1966년 정부는 국토의 균형개발, 공업지대 활성화, 도시인구 분산, 안보 도로 개설 등을 내세우며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한다. 문제는 돈이었다. 정부는 외국에서 돈을 빌리는 차관으로 길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돈을 빌리기가 쉽지 않았다. 기공식이 몇차례나 연기된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고 휘발유값을 200% 인상하기도 했다.
1968년 12월 21일 경인고속도로 개통식이 서울쪽 입구인 양평동 안양천변의 당중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인천과 서울 29.643㎞를 20여분만에 달리게 된 것이다. 개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다. 최대속도 100㎞의 규정 표지판이 세워졌으며 인천 가좌동까지 시속 120㎞로 고속으로 시범 질주했다.
기공식 전 이미 1967년 3월 24일 공사는 시작됐다. 개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철야작업은 밥먹듯이 이뤄졌고 겨울에 길이 얼지 않도록 비닐을 덮어 씌워가며 공사를 했다. 포장공사 장비가 부족해 인근 마을의 황소까지 동원해 아스팔트를 다지는 공사를 진행했다. 육사출신의 공병 장교들이 현장감독으로 활동했으며 이들은 영어로 공법이 적힌 책을 펼쳐보며 현장을 감독 관리하며 공사를 해 나갔다. 공사기간은 1년 9개월 정도 걸렸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사일을 8개월에 불과했다.
경인고속도로는 개통됐으나 막상 달릴 고속버스가 없었다. 당시 국내에 고속도로용 버스가 없었다. 교통부는 시속 50㎞급 이상 급행버스를 보유한 운수업체에 임시 운행 허가를 내줬다. 1969년 4월 한진관광이 처음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1870년에는 삼화고속과 풍전여객 등 3개업체 버스 30대가 서울~인천 경인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인천 종점의 버스터미널은 동인천역 인근이었다. 이후 한진고속은 풍전여객 버스 10대를 인수해 통합 운행한다.
종전 경인국도를 달릴 때 1시간 20분정도걸렸으나 40분으로 40분정도 단축됐다.
1969년 한진은 일본으로부터 고속도로형 대형버스를 들여와 운행하기 시작했다. 시속 120㎞까지 달리는 초고속 버스였다. 버스 안에는 냉난방 장치와 고성능 스테레오가 있었다. 버스에는 제복을 입은 고속버스 안내원이 있어 승차표 검사는 물론 커피와 사탕, 물수건을 고객을 전해주며 편의를 제공했다. 당시 사람들은 ‘달리는 궁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속버스 안내원은 일반 버스 안내원과 달리 매우 인기가 높았다. 고졸 학력의 자격조건을 두었으며 신장도 일정 수준이 되어야 했다.
 창기 동인천에서 서울까지 직행하던 고속버스는 1973년 가좌동IC앞 버스정류소에 멈추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수출공단 5공단에 출퇴근하는 직장인을 위한 배려였다. 이후 고속버스는 부평에 출발하는 노선이 새로 생겨났고 연안부두와 계산지구에서도 출발하는 노선도 생겨났다. 지금은 송도국제도시를 비롯해 청라지구와 논현지구, 계산동 일대를 오가는 고속버스 노선이 탄생했다.
고속버스는 오랫동안 삼화고속이 독점해왔으나 지금은 여러 운수 회사들이 노선을 분할한 형국이다. 인고속도로는 인천을 발전시켰다. 특히 인천항 수출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천을 서울에 종속시키기도 했다. 서울에 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천에 집을 마련해 서울로 출퇴근 하기 때문이었다. 경인, 경부 등 고속도로 건설은 대한민국 산업화를 크게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 유지 입김으로 노선 바뀌어… 통행료 논란도
 금의 경인고속도로 구간은 처음과 달리 만들어졌다. 당초에는 서울 사직동을 출발해 김포공항 인근을 거쳐 인천 송림동 로터리에 도착하는 것으로 설계됐다. 그러나 이 노선은 서울 양평동부터 한창 건설중인 인천항 제2도크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일설에 의하면 인천 방향으로는 도화동 선인학원을 지나 인천공설운동장 앞길과 연결해 부두쪽으로 닿도록 설게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선인학원의 백인엽 선엽 형제의 입김으로 용현동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용현동 방향으로 변경된 코스는 염전 지대를 통과해야 했기에 지반 침하가 심해서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인고속도로는 부평IC를 지나 서인천IC에서 왼쪽으로 휘어진다. 고속도로가 인천항과 맞닿게 하기 위함이었다. 고속도로의 휘어진 부분인 서인천IC~인천 종점이 이번에 일반화되는 것이다. 이 구간은 구간은 상습 정체 구간이기도 하다. 서인천IC~청라지구의 직선화가 새로 생겨나 경인고속도로는 직선화가 되었다. 이 도로가 청라를 거쳐 청라~영종의 제3연륙교가 생기면 인천공항과도 바로 연결된다.
 인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인천시민들은 통행료를 낸다. 경실련 등 인천의 주요 시민단체와 시민들은 끊임없이 통행료 폐지를 요구해왔다. 주된 이유는 이미 도로 이용료로 투자금이 회수됐고 고속도로의 상습 정체로 고속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를 관리 운영하는 도로공사측은 전국적으로 요금체계가 똑같아 한 곳만 폐지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경인고속도로 인천 구간이 일반화되어도 통행료는 계속 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일반 도로되는 인천구간엔 공원과 녹지 주차장 등 들어서
경인고속도로 인천 구간은 일반도로로 전환됐다. 일반도로화 대상은 경인고속도로 전체 22.11km 중 인천 기점부터 서인천IC까지 10.45km 구간이다.
공사가 시작되면 고속도로 중간중간에 16개 교차로를 건설하기 위해 일부 차로의 통행이 통제되고, 차량 제한속도는 시속 100km에서 60km로 하향 조정되기 때문에 교통혼잡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고속도로 주변 원도심은 9개 생활권으로 나뉘어 맞춤형 개발사업을 거쳐 4차산업혁명 기지, 복합문화벨트 등으로 거듭난다. 또 공원·녹지 16만7000㎡, 문화시설 7만9000㎡, 권역별 주차장 총 1670면이 새로 조성된다. 총 사업비는 4000억원으로 2024년 완공이 목표다.
인천시는 애초 단계별 착공 방식을 택했지만, 시민 불편을 최소화하고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전 구간 동시착공 방식을 적용하기로 했다.
멀쩡한 고속도로를 뜯어내 일반도로로 전환하는 것은 현재 상태의 고속도로 기능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시민에게 돌아가는 유무형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절과 정체를 통합과 소통으로, 먼지와 소음이 가득했던 도로를 녹음이 우거진 문화공간으로 바꾸며 지역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것이 인천시의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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