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병인양요, 마침내 서양과 군사적으로 충돌(시리즈 17)
1866년 병인양요, 마침내 서양과 군사적으로 충돌(시리즈 17)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7.12.2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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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하자 프랑스군 강화 침략, 외규장각 도서 약탈, 정족산서 프랑스군 격파,

 

병인양요때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기습한 김포 문수산성. /김포시청 제공

18세기 말부터 한반도 일대에 서양선박인 이양선이 잇달아 출몰한다. 조선은 마침내 19세기 중반들어 외국 이양선들과 군사적으로 무력 충돌을 하면서 쇄국정책을 더욱 굳건히 한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됐다. 신자들이 알게 모르게 늘어났다. 조선 정부와반대로 일반 백성들은 외국인들과 몰래 접촉을 하기 시작했으며 숫자는 크게 증가했다. 조선은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866년 1월 조선은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베르뇌등 선교사 9명과 남종삼 등 천주교도 8000여명을 처형한다. 이른바 병인박해다. 그 해 5월 프랑스 신부 리텔은 조선의 박해를 피해 청으로 탈출한 뒤 프랑스 함대에 병인박해 사실을 알린다.
 프랑스는 “조선을 어떻게 하라”며 청나라에 압력을 넣는다. 청은 개입하기가 어려우니 프랑스에 화해를 권고하고 조선에는 프랑스의 침략 계획을 알려준다.
 1866년 5월 조선을 빠져나간 리델 신부는 중국 천진에 도착해 로즈극동함대 사령관에게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실을 전달한다. 로즈제독은 프랑스 해군성과 베이징 주재 대리공사 벨로네에게 군사적 응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군사 행동을 취할 것임을 암시한다.
 마침내 8월 10일 로즈제독은 3척 함대 이끌고 중국 체푸항을 출발해 조선으로 향한다. 리델신부가 통역을 맡는다. 이들은 한강수로를 찾기위해 조선해역을 정찰한다. 팔미도와 작약도, 강화도 해역을 정찰한 후 한강 입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조선군의 접근 저지를 뚫고 행주산성을 지나 양화진 인근 염창항까지 진입한다. 한양도성 턱밑까지 온 것이다. 프랑스군이 들어왔던 곳인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천주교 절두산 성지가 세워져 있다.
 조선을 정찰한 프랑스 군은 8월 23일 인천 작약도를 떠나 중국으로 귀환한다. 조선의 지리를 정탐한 로즈제독은 9월 3일 군함 7척과 군사 1000여명 이끌로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한다. 조선은 3일이 지난 6일에야 프랑스군이 강화도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부랴부랴 총사령부 순무영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도순무사 이경하, 사령관에 이용희, 부사령관 양헌수를 임명하고 훈련도감 병사 주축으로 군대를 구성한다..
 9월 7일 프랑스군은 강화성 남문을 공격하고 조선군은 도망을 간다. 프랑스군은 다량의 금과 은, 주요문서 서적 무기 등을 노획한다. 노획품에 외규장각 도서도 포함되었다.
 9일 이용희와 양헌수는 보병 500명과 기병 100명으로 구성된 순무영 선봉대를 이끌고 양화진에서 출정식을 갖고 강화도로 떠난다. 대원군이 이들을 직접 격려했다. 군수품 보급 원활히 하기 위해 전국 보부상 동원시켰다.
 조선 부사령관격인 순무천총 양헌수가 격문을 통해 프랑스 침략을 비난하고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로즈제독은 프랑스 선교사 처형 문제 관련자 및 3정승 처벌과 수호조약초안 공동 작성 등을 요구했단. 조선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양헌수 휘하부대가 문수산성에 잠복해 있다가 프랑스 정찰대를 기습했다. 양헌수 장군은 전국에서 온 포수 500여명으로 정예부대를 편성해 10월 1일 정족산성에 매복하고 프랑스군 150여명을 격파했다. 프랑스군은 10월 4일 강화유수부 관아를 불사르고 갑곶나루로 이동 후 10월 13일 철수했다.
 2017년 5월 15일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성에서 산성의 지휘소 역할을 했던 '장대'의 복원 준공식이 열렸다. 병인양요 당시 격전지였던 장대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일종의 지휘소로, 문수산의 동쪽 최정상(해발 고도 376.1m)에 있다. 이곳은 서울, 서해, 인천 강화도, 경기도 파주·김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한양 도성으로 향하는 해로의 방어 기지 역할을 했다
 병인양요 당시 조선은 프랑스군과 전투하기 위해 전국의 사냥꾼과 보부상을 동원했다. 보부상들은 규율이 엄격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체력이 튼튼했으며 향포수라 불리는 사냥꾼들 은 총기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양헌수 휘하 전체 537명 병졸 중 367명이 사냥꾼과 보부상이었다. 프랑스군 35명 사상(사망 6명, 부상29명). 조선군은 1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했다.
 병인양요로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이 오간 양천 김포 통진 부평 주민들은 피난길에 올라야했고. 한양의 생필품값은 폭등했다. 조선 대외정책은 더욱 폐쇄적이 되었으며 프랑스의 국가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서울 합정동 절두산에 있는 척화비.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있는 절두산은 한국 천주교의 순교 사적지다.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이라 불리던 이곳의 명칭이 절두산으로 바뀐 것은 1866년 병인박해부터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진출했다가 물러나자 프랑스 함대와 천주교 신자들이 내통했다고 생각한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양화진 인근 절두산에서는 200여 명이 참수를 당했다.
 1956년 절두산 순교지를 매입한 한국 천주교회는 1966년 순교기념관 건립에 착수했으며 1967년 완공 뒤 축성식을 열었다. 기념공원으로 꾸민 앞마당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1821∼1846) 신부의 동상이 세워졌다.

◆병인양요때 빼앗겼던 외규장각 도서 ‘145년만에 귀환’
 지난 2011년 4월 14일에 병인양요때 프랑스에 약탈됐던 외규장각 도서가 145년 만에 우리 나라로 돌아왔다. 외규장각 도서는 조선 왕실의 중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기록문화의 꽃으로 평가받는 귀중한 자료이다. 영조가 정순왕후를 왕비로 맞이하는 결혼식 내용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등 귀중한 자료가 많았다.,
 프랑스 외규장각 도서는 1975년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씨가 베르사이유 별관 파손 창고에서 처음 발견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1992년 7월 주불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요청했고, 199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에서 '교환 기본원칙'이 합의됐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반환을 주장하는 우리 나라와 달리 프랑스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와 비슷한 가치를 지닌 우리 문화재를 요구했다.
 결국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에서 양국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를 5년 단위 갱신이 가능한 임대 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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