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1867년 일본, 천지개벽의 시동을 걸다(시리즈 21)
1854년~1867년 일본, 천지개벽의 시동을 걸다(시리즈 21)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8.02.2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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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과 통상조약, 존왕양이 부르짖으며 포격전, “막부 타도를”한쪽에선 “서양을 알자”
일본 하기역앞에 있는 하기성 모형. 하기는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죠수번의 수도였다.

 1853년 미국의 페리함대 내항 이후 일본은 격랑에 휩싸인다. 막부는 기득 세력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고 막부와 등을 져 오랫동안 외곽으로 밀려나 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등 변방 세력들은 막부 타도를 외치며 새로운 세계를 꿈꿨다. 신진 세력들은 존왕양이(尊王洋夷· 천황을 지지하고 서구 열강을 배척함)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내 서구의 위력을 실감하고 서구 배우기에 나섰다. 일본은 개항 이후 메이지 유신전까지 막부파와 반막부파의 대립과 전쟁, 서구 열강들과 포격전, 서구 알기 등 숨가쁜 시간을 보낸다. 1867년 마침내 막부가 권력을 내어놓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 시대를 연다.
◆개항 이후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1853년 미국 페리함대가 무력 시위를 벌인 후 얼마있지 않아 러시아 선박이 일본 나가사키를 내항한다. 오랫동안 지방 영주의 세력을 커짐을 막기 위해 대형 선박 건조를 금지해왔던 막부는 대형선박 건조 금지를 해제한다. 일본은 1854년초 일찌감치 찾아온 미국과 마침내 화친 조약을 맺고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기로 합의한다. 이어서 영국과 러시아, 네덜란드 등과 화친 조약을 맺는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잡기 전 20대 초반의 요시다쇼인은 미국 군함을 몰래 타고 밀항을 시도하려다 붙잡힌다. 그는 1855년 하기 감옥에서 석방되어 가택연금을 당한다. 이후 학교를 열어 이토 히로부미 등 나라를 구하겠다는 젊은 청년들을 교육한다. 그해 나가사키에 해군전습소가 마련된다. 10월에 에도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4000명이 사망한다.

감옥에 있는 요시다 쇼인.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이뤄졌다. 막부가 고민 끝에 독단적으로 맺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항구를 개항하고 자유무역을 하며 외국인 거류지 설치 등이었다.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관세도 협정관세로 하기로 했다.
일본 세력들이 들끓고 일어났다.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막부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1858년 안세이대옥이 벌어진다. 막부파와 반막부파의 충돌이었다. 막부 진영이 우리 아직 죽지 않았다는 몸부림이었다. 하기 출신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 젊은이들을 가르친 요시다 쇼인이 이 때 목숨을 잃었다. 반대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통상조약을 맺은 막부 핵심 인물을 살해했다.
조약 비준서 교환은 미국에서 진행됐다. 미국은 일본에게 미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겠다는 속셈이 있었다. 1860년 2월 막부 사절단은 미국이 마련한 기선 ‘포화탄’을 타고 미국 방문길에 오른다. 막부는 사절호위라는 명목과 함께 일본 해군의 원양 항해 훈련을 위해 일본 최초의 군함인 칸린호(咸臨丸)를 보낸다. 이 배는 네덜란드에서 10만달러를 주고 사온 300톤급 군함이었다. 이 배에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친 후쿠자와 유키치도 동승했다. 37일만에 항해에 미국에 도착한 사절단은 미국의 신세계를 곧바로 흡수하려 한다.
1860년 네덜란드에 군함 건조를 주문하고 유학생 15명을 보낸다. 유학생 중에 국제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일본학생 에노모리가 있었다. 그는 ‘해상국제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했다. 훗날 그는 외교관이 되어 조선의 외교정책에도 간여한다. 그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일하던 하나부사 요시모토 서기관을 조선에 전출시킬 것을 건의했고, 1876년 10월 조선으로 파견 명령을 받았다. 하나부사는 초대 주한일본공사로 6년이나 근무한다.
1862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영국인 살해사건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사건 책임자인 막부와 사쓰마번과 영국이 포격전을 벌인다. 사쓰마번은 배상금지불과 범인 조사를 약속하며 서양의 위력을 실감, 군사력 증강의 절실함을 깨닫는다. 1864년에는 조슈번과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에서 한 판 붙는다. 4개국 함대는 무역을 방해하는 조슈번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공격하려 했다. 조슈번은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시모노세키 조후(長府) 앞바다에서 포격전을 펼친다. 조슈번은 서양 군대의 위력을 실감하며 참패한다. 배상 협상때 영국에 갔다 돌아온 이토 히로부미가 통역으로 참석한다. 조슈번 측과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의 토지 보상과 배상금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며 이를 관철시키는 협상력을 발휘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훗날 여러 차례 외교 회담을 거치면서 이때의 협상술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863년 조슈번은 막부의 허락도 받지않고 번의 중심지를 하기에서 야마구치로 옮긴다. 1863년과 1864년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젊은이들은 유럽견학에 나선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조슈 화이브의 젊은이들이었다.
1866년 각자 세력을 키우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동맹을 맺는다. 이른바 삿초동맹이다. 사쓰마번 등 무기를 사기 어려웠던 조슈번에게 무기를 대신 사 준다. 막부에 저항하기가 한결 쉬워졌고 마침내 이들이 주축이 돼 막부세력을 꺾는다. 1866년 일본 근대화의 길을 여는 또 하나의 사건이 생긴다. 일본 최고의 지식인이라 여겨지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이 발행돼 서구의 실상을 일반 백성들에게 알린다. 그는 1860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던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몰락 직전의 막부에서 외국 관련서류 번역담당관으로 근무했다. 1861년에는 막부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약 1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이런 경험으로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그는 ‘서양사정’을 펴내 일본의 일반 국민들에게 천지개벽의 서양 사회를 자세히 소개한다.
그 해 말 고메이 천황이 급사한다. 사인은 천연두였으나 막부에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반막부파에서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관련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1867년 메이지천황이 즉위한다. 그해 10월 막부의 15대 쇼균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국가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대정봉환이 이뤄진다. 일본 개벽의 시점이었다. 쇼군은 뒤에서 계속 권력 행사를 하려 했으나 이는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12월 왕정복고가 단행되고 막부를 반대했던 신하들의 사면 복권이 이뤄진다. 이른바 왕정복고 대호령이다. 1868년 마침내 메이지 시대가 열린다. 실권을 잃은 막부는 전쟁을 결의, 마지막으로 저항한다.

삿초동맹 기념우표.

◆1886년 삿초동맹, 막부를 꺼꾸러뜨리다.
오랫동안 막부로부터 서러움을 당하고 일본의 변두리 번에 속했던 사쓰마와 조슈는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 그러나 두 번의 공통점이 있었다. 막부를 무너뜨리겠다는 목표였다. 1864년 조슈번이 막부를 공격할 때 사쓰마는 막부 입장에서 조슈를 제압했다. 사쓰마는 막부를 제압하고 싶었으나 그들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중재자의 노력에 의해 두 번은 서로 필요한 것을 얻게 된다. 조슈는 군비 확충이 시급했다. 사쓰마번이 무기를 사기 어려웠던 조슈번에게 무기를 대신 사 준다. 대신 흉년으로 쌀이 부족했던 사쓰마에게 조슈번은 군량미를 조달해줬다.
 마침내 1866년 각자 세력을 키우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막부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아래 동맹을 맺는다. 이른바 삿초동맹이다. 조슈번이 막부와 싸움을 벌일 경우 사쓰마는 무조건 조슈편을 들기로 했다. 마침내 조슈번과 막부는 전쟁을 벌인다. 조슈는 병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막부를 물리친다. 이제 막부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일본은 이후 막부를 쓰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쓰마와 조슈번 출신의 젊은이들에 의해 메이지유신과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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