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고종 즉위… 10여년간 대원군 시대로(시리즈 27)
1863년 고종 즉위… 10여년간 대원군 시대로(시리즈 27)
  • 이두 기자
  • 승인 2018.06.0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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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무소불위, 고중 권력 생각못해...1873년 최익현 상소로 마침내 고종 친정

 

고종이 즉위한 창덕궁.

일본이 개항하고 막부와 반막부파가 대결하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는 1860년대 조선은 왕이 교체된다. 1863년 11월 철종이 불과 33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당시 궁궐의 최고 어른은 신정왕후 조대비였다. 조대비는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고 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으로 지명했다. 고종(高宗·1852~1919) 탄생의 순간이었다. 1863년 12월 고종은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갖고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10년간 대원군이 사실상 왕 노릇을 하고 1973년이 되어서야 고종의 친정 체제가 된다.
 ◆12세에 갑자기 왕이 된 고종
 1863년 12월 강화도령 철종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궁궐의 가장 큰 어른인 신정왕후 조대비는 “흥선군의 적자 중에서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시키기로 정한다”로 지시한다. 12살짜리가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조대비가 대원군과 밀약해 고종을 지명한 것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대한 오랜 설움에서 벗어나고 왕이 되지못하고 세상을 떠난 남편효명세자의 위업을 대신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고종은 1852년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재황(李載晃), 아명은 이명복(李命福)이다. 왕이 된 후 외자를 왕의 이름자로 삼는 전통에 따라 이름을 바꾼다. 순종실록부록에는 이희(李熙)로 되어있다.
 하루아침에 동네 개구쟁이에서 왕이 된 고종은 서서히 왕으로서 자질을 갖춰나간다. 1866년 고종은 여흥 민씨 집안의 민자영과 결혼한다. 훗날 명성황후(1851~1895)이다.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민씨 집안으로 대원군은 처가쪽이 변변치 않아 득세할 인물이 없다고 보고 자신이 직접 낙점한 인물이다. 결혼 당시 고종은 궁궐 안에 이미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고종보다 무려 9살이나 많은 상궁 이씨였다. 이 상궁은 궁궐 생활에 답답해하고 청소년기에 들어서는 고종에게 더할나위 없는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유일하게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였다.
1868년 고종은 자신의 첫 사랑인 상궁 이씨에게서 아들을 얻어 아버지가 된다. 아들은 완화군(完和君)이다. 고종은 완화군을 곧바로 맏아들을 뜻하는 원자에 봉하려했으나 대원군의 반대에 부딪친다. 1871년 명성황후는 꿈에도 그리던 첫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며칠 만에 죽고 만다. 명성황후는 아들의 죽음이 시아버지 대원군 때문이라며 이때부터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갈등이 시작된다. 명성황후는 1873년 다시 아기는 낳았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곧바로 세 번째를 임신하는 데 그 아기가 바로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이다. 고종은 성인이 되었지만 1973년까지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가져오지 못한다. 고종은 권력을 놓고 아버지와 대립하게 되고 급기야 대원군을 반강제로 권력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대원군은 이후 고종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 되어 조선말 조선이 비틀거리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부자가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고종 친정, 대일외교의 변화
10여년간 조선은 서양과 일본과 대립으로 여러 차례 소용돌이에 빠진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 등으로 서양세력과 무력으로 부딪쳐야 했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과는 새로운 외교 관계 수립여부를 놓고 긴장이 높아만 갔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고종은 어찌할 수 없었다. 마침내 1873년 조선 정국이 소용돌이쳤다. ‘대원군 10년의 실정’을 비판하는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왔다.
 ‘조정에는 속론이 판을 치고 정론은 사라졌으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기세를 올리고정직한 선비들은 사라졌다. 온갖 세금에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윤리는 파괴되고 선비의 기풍은 죽었다. 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공연히 문제를 일으킨다 하고, 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고 한다. 몰염치한 자들이 버젓이 행세하고 지조있는 사람은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대원군 입장의 신하들은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은 오히려 최익현을 호조참판으로 승진시킨다. 최익현은 두 번째 상소를 올렸다. 전국 서원 철폐의 부당성, 청나라 돈인 청전의 사용 폐해 등 대원군의 실정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마침내 고종과 대원군의 권력 대결이 펼쳐지고 마침내 대원군이 몰락한다. 대원군만 개인적으로 사용했던 궁궐의 문이 폐쇄되고 더 이상 ‘대원위 분부’가 먹히지 않게 됐다. 1873년 말 고종은 말 그대로 왕다운 왕으로 거듭났다. 이후 고종은 영의정과 좌의정을 교체하는 등 친정 체재를 갖추고 원성이 자자했던 원납전과 문세를 폐지, 대원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신하들의 권력에도 큰 변화가 온다. 이전 대원군의 지지를 받았던 남인 북인, 왕실 종친 세력이 약화되고 노론 세력이 증가하고 무엇보다 외척인 민승호 민규호 민치상 등 여흥 민씨 세력이 중심이 된다. 안동 김씨 세력도 예전만 못하지만 다시 살아난다.
 외교에도 변화가 왔다. 대원군이 심어놓았던 경남과 부산 지역의 관료들이 대거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동래부사 초량왜관 대표 등을 임명한다. 일본은 기대에 부풀었다. 몇 차례 일본과 접촉이 이뤄졌다. 그러나 혁신적인 변화는 없었다. 일본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군함을 보내 무력 행사에 나선다. 외교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없이 운요오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을 맞이하게 된다.

고종과 명성황후 결혼식 장면. 여주 박인자 작가 작품이다.

◆조선 26대 왕 고종의 이름...신종 거론되기도
고종의 어릴 적 이름은 명복(命福)이었다. 조선은 왕이 즉위하면 이름을 대개 외자로 삼는 전통을 고수했다. 정조대왕이 이산, 고종도 이름을 바꿨다. 희(熙), 형(㷡), 경(㷡)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은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이 사후에 붙인 묘호다. 당초 거론된 묘호는 고종과 신종(神宗)이 거론됐다고 한다. 중국 역사에 고종은 2명 있었다. 당나라 율령을 정비한 고종이다. 이는 황후 측천무후에게 지나친 권력을 줘 당이 무너지는 데 일조를 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송의 고종은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못해 나라를 위태롭게 한 인물이다. 당시 친일파 권력자들(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등)이 고종에게 미덥지 못한 왕의 이미지를 심기위해 이같은 묘호를 전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나라의 종묘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외국에 바쳤으며 아내(명성황후)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이미지다. 고종도 좋은 의미는 아니라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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