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 강화도를 탐사하다(시리즈29)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 강화도를 탐사하다(시리즈29)
  • 이두 기자
  • 승인 2018.07.17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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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서 대원군 부친 남연군묘 도굴 시도… “서구 개방 압력에 조선 견디지 못할 것”

 

김포 문수산성서 바라본 강화도. 오페르트는 강화도 개항을 요구했다.

고종이 왕이었지만 실제 권력은 대원군이 갖고 있었고 조선이 외국에 대해 문을 꽁꽁 걸어잠그던 1868년 한 외국인이 조선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독일 상인 에네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 1832~1903)가 충남 예산에 있는 남연군(대원군의 부친)의 묘를 도굴하려다 적발됐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외국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갖게 됐고 쇄국 정책을 한층 강화한다. 오페르트는 조선을 세 차례 찾아왔다. 그는 1866년 강화도에 들러서 본 풍광을 그의 책에 남겼다.
◆남연군 묘 도굴 시도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다. 오페르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웠던 도굴범으로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가 동양과 조선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조선을 세 차례 방문했다. 첫 번째는 1866년 흑산도를 거쳐 아산만 일대를 탐사했다. 두 번째는 1866년 해미를 방문해 현감을 만나고 덕적도를 거쳐 강화도를 탐사했다. 천주교 박해가 어느 정도인지도 조사했다. 세 번째는 1868년 입국해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려다 걸려 도망쳤다. 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천주교 탄압을 막고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했다는 추측도 있다. 역사가들은 오페르트가 조선 사람들이 조상을 잘 모신다는 말을 듣고 남연군 시신을 미끼로 대원군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으려 한 것으로 풀이한다.
 그의 행적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않다. 독일인은 그는 자신을 만난 조선 주민들에게 러시아인이라고 말했으며, 그가 아산만에 상륙했을 때 주민들은 길을 안내하는 등 호의적이었다. 오페르트는 담배와 병 등을 주민에게 선물했다. 자신이 타고 온 배도 구경시켜줬다. 이때까지는 상호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는 오페르트의 속셈을 알고 반감을 가졌으며 심지어 곡괭이 등 농기구를 들고 그에게 대들었다.
 미국인 탐험가의 자금 지원을 받은 오페르트는 1868년 증기선을 타고 중국 상하이를 떠나 그해 4월 18일 충청도 아산만의 행담도에 정박했다. 배에는 프랑스 선교사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들도 타고 있었다. 그는 4월 21일 야음을 틈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다. 대원권의 강력한 권력은 아버지 묘가 명당에 묻혔기 때문이라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덤은 석회석으로 단단하게 다져있어 쉽게 파헤쳐지지 않았다. 날이 밝아오고 썰물 시간이 다가오자 도굴에 실패하고 철수한다. 이 소식을 접한 흥선대원군은 크게 노하였다. 조상숭배 사상 때문에 묘를 신성시하는 조선이었다. 심지어 국왕의 할아버지 묘까지 파헤치는 오랑캐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며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였다. 또 천주교인들이 개입하였다는 이유로 이 지역 교인 1000여 명이 해미읍성에서 처형당했다.

오페르트가 그린 강화도 풍경.

◆강화도 탐사 내용 책으로 남겨
 오페르트는 조선의 통상 요구가 실패로 끝나자 독일로 돌아가 ‘금단의 조선’이라는 책을 1880년 냈다. 그는 두 번째 조선 탐사때 강화도를 방문했다. 강화도에 상륙했을 때는 자신을 독일인이라고 하지 않고 영국인이라고 했다고 한다. 영국배를 타고 교동도 앞을 지나 염하를 거쳐 한강 수로에 들어서기 직전에 그는 강화유수를 만나 조선 정부에 통상요구를 전달하고 답변이 없으면 직접 한강을 거슬러 조정에까지 가겠다고 했다.
그는 강화유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만간 조선정부는 포성을 듣게 될 날을 맞이할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도 개방 압력을 견뎌내지 못했는 데 조선은 이 두 나라보다 영토와 국력이 열세인데 서구 열강이 강압적으로 조선의 개방을 요구한다면 얼마나 견뎌낼 수 있겠느냐’
‘금단의 조선’에는 강화도의 모습이 삽화와 함께 글로 기록되어 있다.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도 포대와 마니산을 삽화로 그려 소개하고 있다. 당시 헐벗은 마니산 정상에 두 그루의 나무를 그려 놓았다.
 그가 쓴 '금단의 나라 조선'에는 조선의 자연과 기후 등이 뛰어나고 살기에 좋다고 적었다. 그러나 완강하게 쇄국을 고집하는 조선 지배층에 대해서는 반감이 넘쳐났다. 그는 책에서 조선은 강화도를 비롯해 군산과 동래 송도를 개항해 외국인의 상륙과 교류, 종교를 허가하고 대신 조선의 미풍양속을 존중받으라고 했다. 외국인의 아편과 밀수를 금지하고 선린과 우호를 증진하라고 했다.
◆예산 남연군 묘, 자손 부귀 명당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아래에 있는 남연군 묘는 명당으로 꼽힌다. 파락호 생활을 하는 대원군은 목숨을 부지하면서 속으로는 안동김씨를 꺾을 궁리만 하였다. 가장 좋은 방법이 안동김씨 조상 묘보다 더 좋은 곳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충청도 홍성에 사는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왔다. 그는 흥선군에게 충청도 덕산 가야산이 2대 천자지지가 나올 명당이라고 소개했다. 정만인을 따라 가야산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명당자리에는 석탑이 서있었다. 정만인은 탑 자리에 묘를 쓰면 십년 안에 틀림없이 제왕이 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흥선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대원군은 아들이 제26대 고종으로, 손자는 27대 순종이 되었기에 2대 천자지지는 현실화된 셈이다.

오페르트가 타고온 배.

◆'동양에 많은 관심' 오페르트, 중국에서 무역업
183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여행가이자 인종학자였다. 1851년 19세때 홍콩으로 건너와 상해로 들어가 상점을 열고 무역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과 동양의 문물과 인종에 대해 공부한다. 돌아가 ‘동아시아 견문기-인도와 중국 일본 한국의 모습과 회상’ ‘한 일본인의 추억’ 등의 글을 남겼다. 1903년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오페르트는 도망가면서 경기도 영종진(永宗鎭)에 이르러 대원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대원군 좌하(座下). 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본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과도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군사와 백성들이 어찌 석회를 부술 기계가 없었겠습니까? 절대로 먼 데 사람의 힘이 모자라서 그만두었으리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귀국의 안위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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