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포천 최익현, ‘대원군 10년’을 무너뜨리다
1873년 포천 최익현, ‘대원군 10년’을 무너뜨리다
  • 이두 기자
  • 승인 2018.08.0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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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실정 강력 비판한 상소 올려… 흥선군의 전용 궁궐 출입문 폐쇄

 

최익현 영정.

  1873년 10월 조선 조정을 뒤흔드는 상소가 경기도 포천에서 올라온다. 상소를 쓴 인물은 포천에 살며 강직한 선비로 이름난 최익현(崔益鉉·1883~1906)이었다. 최익현은 고종이 자신을 동부승지로 임명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사직상소를 올렸다. 사직상소였으나 대원군의 실정과 조선 조정을 강력히 비난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1873년은 명성황후가 고종을 이을 후계자 순종을 임신해 명성황후가 고종과 함께 권력에 중심으로 이동하는 시기였다.
◆조선 조정 뒤흔든 최익현 상소
조선 조정에 올라온 최익현의 상소 내용은 대략 이렇다.
‘최근의 정령은 옛 전장을 변경하길 거듭하며, 인재를 선발한다며 나약한 사람만 쓰고 있습니다. 대신들은 아무 의견도 아뢰지 않고 대간과 시종들은 딴청만 피우고 있습니다. 조정에는 속론이 판을 치고 정론은 사라졌으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기세를 올리고 정직한 선비들은 숨어버렸습니다. 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공연히 문제를 일으킨다 하고, 개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처신을 잘 한다고 합니다. 몰염치한 자들이 버젓이 행세하며, 지조있는 사람은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상소에서 개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대원군의 권력을 보고 대원군 말만 듣는 인물들을 말한다.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문을 보고 “이 상소문은 가슴에서 우러나왔고 나에게 준엄하게 경계한 말이니 가상하다”고 하며 “이 상소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인물이 있다면 소인배가 틀림없으리라”고 했다. 고종은 최익현을 동부승지에서 호조참판으로 승진해 임명했다. 1873년 11월 최익현은 두 번째 상소를 올린다. 주요 내용은 대원군이 철폐한 만동묘와 화양서원 등 전국 서원을 다시 세우고, 심각한 경제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청나라 돈인 청전(淸錢)의 유통을 금지하고, 먼 친척 자제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는 일을 금지하라는 등이었다. 흥선대원군쪽에서는 최익현의 상소에 분노하고 그를 유배보내야 한다고 했다. 대신들은 최익현을 ‘아버지와 아들을 이간질시키는 흉악한 사람’‘ 애매모호하게 사건을 날조한 사람’으로 공격했다. 고종도 최익현을 귀양보내라고 지시한다. 상소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된다.
최익현의 상소는 대원군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대원군의 경복궁 전용 출입문이 폐쇄돼 대권을 맘놓고 출입할 수 없게 됐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 권력인 ‘대원위 분부’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됐다. 이미 20세 넘은 고종은 대신들에게 자신와 대비에게만 충성하라고 했다. 마침내 1873년 12월 고종의 진정한 왕의 권력을 갖고 조선을 이끌어가게 된다.
◆'위정척사' 이항로 제자
면암 최익현은 포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라시대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의 27대손인 그는 태어날 때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눈빛이 별빛 같았다고 한다. 관상가는 아기를 보고 범의 머리에 제비 꼬리와 같은 턱의 모습을 한 호두연함(虎頭燕頷)형이니 한없이 귀하게 될 상이라고 했다. 어릴 때 이름은 기남(奇男)이었다. 포천에는 최익현의 본관인 경주 최씨가 오래전부터 몰려살고 있었다. 9세 때인 1841년 김기현(金琦鉉)의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했으며, 11세 때인 1843년 경기도 양평으로 이주해 14세 때부터 당시 대유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공부한다. 최익현은 이때 성리학의 기본을 익혔으며, 애국과 호국 정신을 배워 훗날 ‘위정척사’ 사상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이항로는 최익현이 15세 되던 해 그의 인품을 격려하기 위해 ‘면암(勉庵)’이라는 글을 써서 주었는데, 이것이 아호(雅號)가 되었다.‘ 힘쓰는 사람’이란 뜻이 담겨있었다.
 20세 때 청주 한씨를 부인으로 맞았고, 22세 때에는 다시 고향인 가채리로 돌아와 과거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23세 때인 1855년 3월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 11등으로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강원 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신창 현감·성균관 직강·사헌부 장령·돈녕부 도정 승정원 동부승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는 강직성을 보여 주었다. 특히 순강원 수봉관으로 재직할 때, 나라 의식을 관장하는 예조판서가 금지 구역에 묘 쓰는 것을 도와주자 직접 그를 찾아가 “어찌 나라 녹을 받는 대신께서 국법을 어기시려 합니까?”라고 호통 친 일화는 유명하다.
 최익현은 1868년 36세 때 사헌부장령으로 임명됐다. 사헌부는 오늘날의 감사원 같은 곳으로, 잘못된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벼슬아치의 잘못을 탄핵하던 관청이다. 최익현은 상소문 시폐(時弊) 4조를 올리는데, 대원군의 정책에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취렴정치(백성의 제물을 탐내어 함부로 거둬들이는 것)를 금하며, 당백전(경복궁 공사하면서 새롭게 발행한 돈, 오늘날의 국채 같은 것)을 혁파하고, 4대문의 통행세를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대원군의 실정으로 언로가 막히고 민정이 절박했던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말 한마디 못하던 상황에서 최익현은 목숨을 건 상소문을 썼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충남 예산에 있는 최익현 묘 이장 운동 전개
최익현의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다. 최익현은 의병 운동을 펼치다 일본에 붙잡혀 대마도에 유배돼 1906년 대마도에서 순국했다. 최익현의 시신은 부산으로 운구됐다. 부산에 시신이 도착하자마자 각계각층의 국민이 애도하며 몰려들었다.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자 일제는 두려움을 느꼈고, 운구가 계속 북쪽으로 올라오다 논산에 이르러 가매장됐다. 2년 후 예산으로 옮겨 인적이 드물고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묘소를 만들었다. 현재 묘소는 고향으로 유해를 보내달라는 면암 선생의 유언을 무시하고 일제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일제는 유족이나 유림의 동의를 얻지 않고 시신을 안장했다. 포천에서 면암문화제를 개최하는 등 면암 정신을 기리는 면암 최익현선생 숭모사업회는 면암 선생 묘소 이전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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