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는 '신이 내린 낙원'...서풍받이 해안사구 등 절경
대청도는 '신이 내린 낙원'...서풍받이 해안사구 등 절경
  • 박웅석 기자
  • 승인 2018.09.2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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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소나무가 많은 섬이어서 대청도… 고려 때 원나라 황태자들이 권력 다툼 속에 잇달아 유배

 

대청도 선진포항 일대 전경.

서해 5도의 하나인 대청도(大靑島)는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약 171㎞가 떨어져 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면 4시간 정도 걸린다. 약 40㎞ 거리에 백령도가 있다. 백령도와는 배를 타고 20여분 거리다. 대청도는 특이한 해안과 산세, 깎아지른 듯한 절벽 등 지질학의 보고이며 풍광이 빼어나다. 지난 2009년 대청도 인근에서 남북 무력 충돌이 일어나 뉴스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대청도 나이테 바위.

◆지질학의 보고 신이 내린 낙원
대청도는 서해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백령군도에 속한 섬이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인천시 옹진군 대청면 대청리에 속한다. 대청도의 면적은 12.623 ㎢, 인구는 1300여명, 740여 가구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백령도행 배를 타면 오며가며 대청도를 들른다. 인천항에서 여객선으로 4시간정도 걸린다. 대청도는 지질학의 보고로 불릴 정도로 매력적인 풍광이 많다. 모래 해안을 비롯해 각종 사구나 바위, 절벽 등이 천혜의 장관을 자랑한다. 가장 풍경이 뛰어난 곳은 남서쪽 바닷가에 위치한 서풍받이다. 웅장한 수직절벽에 솟아있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다. 위에서 쳐다보는 아래는 아찔하지만 그야말로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서풍받이는 중국에서 서해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막아주는 지형적 특성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조각바위는 700여 년 전, 원나라 마지막 임금인 순제가 유배를 와서 사색을 즐겼던 곳으로, 황제가 될 기운을 얻어갔다는 후문으로 ‘좋은 기’를 받기 위한 명소이기도 하다.
대청도는 크게 5개의 큰 해안이 있는데 동쪽으로 지두리 해안과 농여해안, 서쪽으로 답동해안, 남쪽으로 모래울해안, 북쪽으로 옥죽해안이 있다. 지두리해안과 모래울해안, 농여해안과 옥죽해안은 거의 붙어 있다. 그밖에 용머리해안, 기름항아리해안, 독바위해안 같은 크고 작은 해안들이 곳곳에 있다. 모래울해안 앞쪽으로는 작은 바위 2개가 우뚝 솟아있는데, 흔히 갑죽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 바위에서 대나무가 자라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섬 주변의 해안사구도 있다. 옥죽동 해안사구에는 바닷가 모래언덕인 해안사구가 있는데, 옥죽동 해안사구는 해변에서 떨어져 있어서 모래사장 분위기가 난다. 옥죽동 해변 백사장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생긴 것으로, 길이는 무려 1km에 폭도 500m에 달하고 약 30m 높이까지 올라가 있다. 이 사구는 우리 나라에서 큰 해안 사구중 하나이다. ‘한국의 사하라 사막’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청도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북쪽에 서식하고 있는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 당시에는 동백나무 수천그루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서식중인 동백나무는 1980년대 심어졌으며 5~7㎝ 굵기의 100여그루가 여러 무더기로 나뉘어 서식하고 있다.

'한국의 사하라' 대청도 해안사구.

◆유배지였던 대청도
대청도는 예전에는 포을도(包乙島)로 불렸다. 대청도는 이름 그대로 섬 전체에 푸른 소나무가 무성했다. 그래서 푸른 섬의 한자 표기인 포을도라 불렸다. 고려가 통일하기 전인 후삼국시대에 후백제 견훤이 서해 앞바다를 침략했다. 백령도에 귀양와있던 장수 유금필이 백령도의 포을도의 장정들을 뽑아 후백제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세종때 편찬찬 고려사지리지에 “고려는 곡도를 백령으로 개명해 진을 설치했고 1018년에는 진장을 배치하고 대청도를 부속도서로 두었다”고 적혀있어 고려초에 포을도가 대청도로 바뀌었음을 알게 해 준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대청도는 오랫동안 죄인들의 유배지였다. 고려 중기인 1278년 삼별초의 난을 평정했던 무신 김방경이 모반혐의로 대청도에 유배된 기록이 있다. 중국 원나라의 세자들이 귀양왔다가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원나라 황제의 아들 애아적이, 1324년에는 발라태자, 1330년에는 원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가 태자시절 대청도로 유배왔다. 당시 고려는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원은 권력다툼이 심했던 시기였다. 나중 원의황제가 된 순제는 무려 600명의 식솔을 데리고 대청도에 왔다. 지금의 대청초등학교 자리가 원 순제가 머물면서 생활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대청초등학교 인근에서 중국 계통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대청중고등학교 인근에는 고려고분군의 흔적이 있다. 고려말 서해상에 해적 출현이 잦아지자 섬 주민들은 육지도 이동한다. 한때 황폐화 되었다가 조선 세종때 대청도에 소를 방목해 키우는 목우장이 설치됐다. 광해군때는 해적 토벌을 위해 수군이 주둔해 해적을 물리쳤다는 기록도 보인다.
◆한때 고래와 홍어의 최대 산지
대청도는 한때 서해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다. 1904년 조선의 어업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본은 대청도에서 고래를 잡았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을 독점했다. 일제강점기대까지 대청도 일대에서 고래잡이는 성행했다. 대청도는 일본 고래잡이 회사들의 전지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청도 연해에서는 참고래가 주로잡혔다고 한다.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조기와 까나리잡이가 한창이었다. 홍어는 전라도 특산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1970~1980년대 국내에서 홍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이 대청도다. 홍어는 봄철에 목포나 흑산도 일대에 서식했다가 수온이 높아지면 대청도까지 올라온 뒤 겨울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 1990년대 이후는 우럭과 볼락 등이 주로 잡힌다. 특산물 바다에서는 홍어, 조기, 복어, 우럭, 가자미 등이 잡힌다. 자연산 미역도 생산된다고 한다.
◆2009년 북방한계 넘어온 북과 대청해전
2009년 11월 10일에 한반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대청도 인근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과 북한 해군 고속정 간에 3번째 서해교전이 벌어졌다.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자 우리 해군이 수 차례 경고통신을 보냈으나 이를 무시하고 경고 사격을 하겠다는 경고마저 수차례 무시했다. 우리 해군은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 사격을 했다. 이에 북한군이 조준 사격을 가해 교전이 벌어졌다. 다행히 우리 해군 측 사상자는 없으며, 북한군의 다수의 사상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 측 경비정은 반파된 채 북한으로 돌아갔다. 제2연평해전이 벌어진지 약 7년 만에 벌어진 교전으로서 북한이 무력 도발을 펼친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난무할 뿐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가장 힘을 얻고 있는 추측은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앞두고 북한이 기선 제압용으로 무력 도발나섰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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