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김검사인가"...위풍당당 80대 피의자(검사의 세계4)
"자네가 김검사인가"...위풍당당 80대 피의자(검사의 세계4)
  • 김별 객원필진
  • 승인 2019.01.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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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따라 기록 넘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오후였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60대 중반 노신사가 검사실 문을 열고 들어 오며 정적을 깨뜨렸다참고인인가.. 피의자로 보기엔 태도가 당당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지금은 실무관으로 호칭이 바뀐 여사무원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고 수염까지 길게 기르신 어르신 한 분이 뒤따라 들어왔다. 사극 촬영장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생경한 모습에 다들 의아해 하고 있을 때, 60대 중반 노신사가 "000 선생님입니다. " 라고 나에게 소개했고 선생님은 엉거주춤 자리에 일어선 나에게 다가 오더니 주저없이 악수를 청했다.
"자네가 김 검사인가"
친분있는 동네사람들로부터 보증서를 받아 주인이 모호한 땅을 어영부영 등기한 사건의 피의자였다. 당시 지방에서는 제법 흔한 사건이었고 사안이 경미하여 '반성문'을 받고 처리하려고 소환한 기억이 났다.
,검사들을 영감으로 부르는 분들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호칭에 찬성하지도, 전혀 달가와 하지도 않았고 그저 내 직함에 맞게 불러 주면 족한데 대뜸 '자네'에 반말이라니. 그것도 피의자가...
아무튼 '피의자용' 딱딱한 접이식 철제의자(2시간이 넘으면 엉덩이가 배겨 빨리 자백하고 싶어진다)대신 접객용 쇼파에 피의자를 모셨다. 감히 반성문이란 말은 못 꺼내고 사건 경과 진술서를 써 달라고 했다.
여든을 훌쩍 넘긴 어르신을 어찌 '엄히 훈계'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어르신이 "김검사, 다 되었네"며 진술서를 내밀었다.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진술서 한 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선생님, 한자로 쓰시면 안되고 한글로 쓰셔야 합니다.
김검사, 그럼 진작에 얘기허지. 허허허. 다시 쓰겠네. 그나저나....커피 한 잔 주게..허허허..
그분은 엄한 훈계는 커녕 커피 한 잔에, 고생하셨다는 말까지 듣고 돌아갔다. 그제서야 수사관이 000 선생님은 유명한 유학자이자 서예가이고, 검사장님은 물론 지역 기관장이 다 제자인 분이라고 알려줬다.
어쩐지.. 눈빛이 맑고 범접 못하는 기품이 예사롭지 않았어. 미리 알았으면 글씨나 하나 부탁할 걸. 기소유예 결정문에서 '엄히 훈계 후'라는 문구를 빼고 그렇게 그날 모처럼 한가한 오후는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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