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진구 가마산에서 유래 전해져 와
◆부산㉰
부산 명칭 시리즈 3번째다. 고구려어에서 나온 ‘수리’는 앞서 말했듯 ‘높은 곳’이나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추석(秋夕)을 순 우리말로 한가위라고 하듯, 단오(端午)는 순 우리말로 ‘수릿날’이라고 한다.
이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즉 머리 꼭대기에서 똑바로 내려쬐는 날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천중절(天中節)’이라는 다른 한자 이름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수리’는 지금도 머리의 맨 위를 뜻하는 ‘정수리’ 등의 단어에 쓰이고 있다. 산봉우리의 ‘-우리’ 역시 ‘수리’에서 ‘ㅅ’이 탈락한 꼴이다.
이 ‘수리’가 땅 이름에서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수리봉, 수리산, 수리바위 등의 형태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원형(原形)인 ‘수리’ 외에도 ‘사라, 사리, 서리, 소리, 살, 쌀, 설, 솔, 수락, 술, 시르, 시루, 시라, 수레, 싸리, 쓰리…’ 등의 다양한 변형을 갖고 있어 언뜻 보아서는 그 원래의 뜻을 알아채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수리’의 한 변형인 ‘시루’가 쓰인 땅 이름도 적지 않아 충청북도 보은군이나 괴산군, 충청남도 태안군 등 전국 곳곳에 ‘시루봉’이나 ‘시루산’이 있다. 북한에도 평양시나 황해도 수안군 등 여러 곳에 ‘시루봉’이나 ‘시루산’이 있다.
그런데 이 ‘시루산’이나 ‘시루봉’을 한자로 바꿀 때 대개 떡을 찌는 시루를 뜻하는 글자 ‘甑(시루 증)’을 썼기 때문에 ‘甑山(증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가 “산의 모양이 시루처럼 생겼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정말 산의 모양이 시루처럼 생긴 경우는 거의 없으며 모두가 ‘수리’의 변형인 ‘시루’ 때문에 생긴 이름에 “시루처럼 생겼다”는 해석을 억지로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마처럼 생긴 산’이 좌천동의 ‘증산(甑山)’이라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부산시도 이를 알기 때문에 그 다음 설명에서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 「가모령」이라고 한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감(枾, 嶺)은 우리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마산’이라는 뜻의 ‘釜山’이라는 이름은 이 ‘가마재’ 에서 생긴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마재’를 ‘가마처럼 생긴 고개(산)’라고 해석하면 또 틀린 것이 된다. 부산이 가마처럼 생긴 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면 한자 이름도 처음부터 ‘釜山’이라 했어야 할 텐데 홈페이지 내용에도 나왔듯이 처음에는 ‘富山’이라 썼기 때문이다.
'釜山’이라는 한자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성종 임금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富山’이라 쓰였고, 성종대 이후 ‘富山’과 ‘釜山’이 뒤섞여 쓰이다가 차츰 ‘釜山’으로 굳어진다.
이를 보면 ‘富山’과 ‘釜山’은 결국 같은 뜻을 가진 우리말을 다른 한자로 표현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富’를 해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땅 이름과 관련한 옛 자료에서 이 글자가 일관된 해석이 가능하게 쓰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복잡한 설명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부평군(富平郡)=금화현(金化縣)’이라고 한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과 ‘富山=釜山’이라는 사실 등을 통해 ‘富=(金)=釜’라는 관계를 알 수 있다는 점만 지적하기로 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金’은 앞서 얘기한 우리말 ‘ᄀᆞᆷ’의 변형 ‘금’을 발음이 같은 한자로 표현한 것이며, ‘釜山’의 ‘釜’ 역시 이 ‘ᄀᆞᆷ’의 변형인 ‘가마’를 한자로 옮긴 것이라는 점만 설명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釜山’은 ‘높은 산’ 또는 ‘신성한 산’ 정도의 뜻을 가진 우리말 ‘ᄀᆞᆷ뫼’가 ‘가마뫼’로 발음이 바뀐 뒤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산의 모양이 가마와 같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ᄀᆞᆷ’이 ‘가마’로 발음이 바뀌어 ‘ᄀᆞᆷ뫼’가 ‘가마뫼’가 되자 “산 모양이 가마와 같다”는 얘기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ᄀᆞᆷ뫼’는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인 ‘가모령’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지금의 좌천동 북쪽 증산(甑山)은 예전에 ‘시루뫼’라 불렸고, 그 뒤에 있는 ‘가모령’은 ‘가마재’나 ‘가모재’ 또는 ‘가마고개/가모고개’ 정도로 불렸다. 그리고 이 ‘가마재’가 한자로 바뀌어 ‘부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부산이라는 이름이 생겼어도 ‘시루뫼’라는 이름은 여전히 남았다가 한자 ‘증산’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시루뫼’도 ‘시루처럼 생긴 산’이 아니라 ‘수리’, 즉 ‘높은 산’이라는 뜻일 뿐이다.
이처럼 ‘부산’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한 ‘가마뫼(가마산)’라는 이름의 산은 이곳 부산시 말고도 전라남도 여수시나 보성군, 북한의 평안북도 구장군 등지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에 여럿이 있다.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부곡동(釜谷洞)’도 근처의 ‘가마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부산(釜山)과 똑같은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