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한국정치, 파국을 향해 질주하다
1959년 한국정치, 파국을 향해 질주하다
  • 최용희 기자
  • 승인 2019.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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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독재 공고화, 조봉암 사형, 조병옥 사망 등 야당 정치인 수난
국산 라디오 첫 등장 , 태풍 사라호 참사, 북송 교포 , 재벌 등장

 

1959년 이승만 독재 공고 등 한국은 매우 시끄러웠다. 사진은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 장면.
대한민국1959년은 이승만 독재 공고 등 매우 시끄러웠다. 사진은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 장면.

 

올해 환갑을 맞은 1959년생이 태어나던 해에 우리나라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대표적으로 공산주의 반대 광풍과 가난, 이승만 독재 체제 공고화를 들 수 있다. 강준만 교수가 저술한 한국현대사산책(인물과 사상사 간) 3권 1950년대편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사회상을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1959년도에 해당하는 제목을 파국을 향한 질주라고 기록했다. 1959년도 주요사건을 알아본다.
1)‘자유당 독재 공고 ’1960
년 대선 승리 체제로
1959122일 이승만 총재, 이기붕 부총재로 하는 대한반공청년단이 발족한다. 전국에 89개 시군 단위 부를 만들어 선거 운동 조직으로 활용하려 한다. 대한반공청년단은 200만 단원과 가족 등 약 400만명을 동원해 선거 운동에 나선다. 3월에는 임화수의가반공예술인단 조직해 이승만 정권 나팔수 역할을 한다. 김희갑 등 수많은 영화인을 폭행하며 예술계 무소불위였던 임화수도 문학계만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최인규 내무장관은 내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의장이 선출되지 않으면 일본과 공산당에 나라를 빼앗긴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말했다. 최인규는 그해 11‘4할 사전투표공개투표라는 부정투표 계획을 세운다. 투표 하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가정해 4할의 투표자를 자유당 지지자로 둔갑시키는 것이었다. 유세장인 인천공원에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민주당의 유세장이었기 때문이다.
2)재일교포 북송반대 시위
1955년 일본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만들어졌다. 중장년 세대가 알고 있는 조총련이다. 북한 기관인 조총련은 북한과 일본 국교정상화의 하나로 재일교포 북송 운동을 추진한다. 19562월 국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가 북한과 일본에 억류 중인 상대방 국민의 송환에 협력하기로 한다. 북한은 19581030일을 귀국 요청의 날로 정하고 대대적인 북송 교포 추진 계획을 세운다.
일본은 60만 재일교포는 처리하기 곤란한 뜨거운 감자였다. 1959년 일본 정부가 북송 추진을 결정하자 한국 정부가 북송을 강력히 반대하며 일본 정부에 압박을 가한다. 그해 2월부터 연말까지 반대 시위가 이어진다. 한국은 대일경제단교 및 일본 왕래 금지 성명을 발표하는 등 더욱 강경하게 나간다.
그해 1214975명의 재일교포를 실은 북송선 1호가 일본 니가타항을 출발, 북한으로 향했다. 막상 북송이 이뤄지자 한국내 반대 시위가 멈췄다. 이를 두고 한국민의 반일 감정을 이용해 이승만 대통령이 권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동원 정책이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재일 조선인 북송은 1984년까지 지속된다.
3)경향신문 폐간
1959430일 정부는 경향신문을 폐간했다. 방송이 없던 시절 당시 20만부를 발행하는 부수 2위의 매우 영향력 있는 언론이었다. 경향신문은 여당인 자유당을 강력 비판해왔다. 특히 24일자 칼럼 여적에서 논설위원인 필자 주요한은 공정 선거가 시행되지 못하면 폭력에 의한 혁명도 있을 수 있으니 한국의 현실을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또 잇달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 기사를 내보내자 마침내 정부는 폭력을 선동했다며 폐간시킨다. 폐간 이유로 공산당의 흉계 분쇄’‘국가의 안전과 언론계 올바른 발전을 내세웠다. 경향신문은 이승만이 하야한 1960426일에 복간했다.
4)조봉암 사형, 진보의 싹을 자르다
1959731일 오전11시 진보당수 조봉암이 사형된다. 그는 그해 227일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을 받는다. 대법원은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 불법 무기 소지 혐의를 인정했다. 변호인단이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방안도 제시했으나 조봉암은 나는 비록 법앞에 죽음의 몸이 되었다고 하여도 나의 조국에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며 거부했다. 이승만 정부는 각 언론에 보도하지 말라며 통제를 가했다. 가족과 지인들은 장례조차 맘대로 못치렀다. 당시 조봉암 사형에 대해 사회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니 이승만의 통제는 나름 성공했다. 조봉암은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80만표를 얻었다. 1956년 대선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선거에도 유효표의 30%가 넘는 216만표를 얻어 이승만의 주요 정적으로 떠올랐다. 이승만은 504표를 얻어 당선된다. 이때부터 자유당쪽에서는 조봉암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4)조병옥 사망
 자유당은 629일 일찌감치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부통령 후보로 확정. 야당인 민주당은 신파 구파로 나뉘어 싸움 중. 1126일 조병옥 대통령, 장면 부통령 후보로 확정. 그러나 조병옥이 19601월 미국으로 위장수술 받으러 갔다가 215일 병원에서 사망한다.
5)재벌의 등장
1950년대 말 삼성그룹이 상업은행 조흥은행 등 4개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가 된다. 16개 계열 기업을 거느린 복합기업으로 탄생한다. 삼호그룹 대한그룹 락희그룹 등이 다양한 회사를 거느리며 재벌로 등장한다. 1959년말 이승만은 원조 경제 탈피를 위해 3개년 경제개발계획안을 국무회의에 올린다. 당시 미국은 미국 원조 없이는 한국 경제 붕괴할 것이라고 평가한다.
6)국산 라디오, 신세계를 열다
 19591115일 금성사가 국산 라디오를 생산, 전국에 보급한다. 1960년에 접어들어 라디오 수신기 보급이 10만대이상 늘어 40여만대에 이른다. 1959년 정부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2500대를 수입해 농촌에 무상 배포한다. 1959415일 부산에서 부산문화방송(HLKU)이 개국한다. 당시 아나운서 인기 1위는 임택근이었다. 시위 도중 시위 중계방송 하라고 불려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7)태풍 사라호 참사
19599월 태풍 사라호가 한반도 남쪽에 몰아닥쳐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 1900년대 최악의 태풍으로 손꼽히며 오랫동안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부산 및 동해 남부선의 축대 유실 등으로 철도 운행이 중단되는 등 육상 및 해상 교통이 두절되었고, 모든 전신 전화의 두절로 외부와의 연락이 불가능한 고립 상태에까지 빠졌다. 낙동강의 범람으로 농경지는 유실 매몰되고 대규모 정전 사태가 일어났다. 태풍 사라호는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800여 명의 사망자와 9,329, 12366동의 주택 파손, 도로·교량·전화 등 662억 원의 재산 피해를 일으켰으며, 특히 부산에 많은 피해를 유발한 태풍으로 기록되고 있다.
8)영화 가요 전성 시대 문열려
1959년 영화 110편 제작 중 멜로 영화가 86편 달했다. 195717세의 나이로 데뷔한 김지미는 일약 영화 히로인으로 등장해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세월이 가면’ 은 1956년 시인 박인환이 즉석에서 만든 시로 여러 사람이 불러 히트.됐다 오래전까지 1959년 현인의 세월은 가고가 최고 유성기 음반으로 확인됐으나 1956년 나애심의 음반이 확인됐다. 1972년 조용필, 1976년 박인희 등이 리바이벌해 불렀다. 영화 유정천리가 개봉된다. 김진규 이민자 박암 등이 출연했다. 국민배우 안성기가 아역으로 나온다. 영화 히트로 주제가 유정천리(반야월 작사, 김부해 작곡, 박재홍 노래)도 덩달아 인기가 치솟았다. 전쟁을 겪은 한국인의 고달픈 삶과 심정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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