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쿠데타, 국민들의 삶과 일상을 바꾸다(61시리즈5162)
1961년 5.16쿠데타, 국민들의 삶과 일상을 바꾸다(61시리즈5162)
  • 최용희 기자
  • 승인 2021.03.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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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절제와 방종 방임으로 싹트던 민주주의 지키지못해
민심 얻기 위해 곳곳에 사회 정화 바람, 재건운동
술집 다방 출입금지, 깡패 소탕에 공무원 기강 확립

 

5.16으로 국민들의 삶이 크게 바뀐다. 사진은 신생활복 발표 장면.
5.16으로 국민들의 삶이 크게 바뀐다. 사진은 신생활복 발표 장면.

1961년은 한국 현대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해이다. 싹이 솟아나던 민주주의를 무절제와 방종, 방임으로 제대로 키우지 못한채 5.16 군부 쿠데타를 불렀다. 국민들의 삶과 일상 생활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 세력은 기존의 헌법을 중지시키고 정당, 정치인의 활동을 제한했다. 군사혁명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 구성돼 곳곳에 사회 정화의 바람이 분다. 내각이 모두 군인으로 구성됐다.

◆‘정치 사회 정화’ 신속한 조치

박정희와 군부세력은 쿠데타를 일으킨 뒤 곧바로 혁명 6대 공약을 발표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과의 유대 공고.
모든 부패와 구악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 진작.
민생고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 총력.
국토 통일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

이 공약은 쿠데타 실무 책임 역할을 했던 김종필이 주도가 되어 작성했으며 당시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잡지 ‘사상계’를 참조했다고 한다.
5월 18일 장면은 내각 총사퇴를 선언하고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한다. 미국 국무부는 한국의 군사 정부를 인정한다고 밝혔고. 육사 생도들은 쿠데타 지지 시가 행진을 벌인다. 이로서 군사 정부가 들어선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박정희가 의장에 임명된다. 군사정부는 국민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단행한다.

먼저 깡패들을 소탕한다. 속죄의 표시로 이정재 등 깡패들을 거리행진 시킨다. 쿠데타 일주일만에 전국에서 범법자 2만7000여명을 단속했다. 이 중 깡패가 4200명이었다. 후에 이정재와 임화수 등은 사형당한다. 공무원 세계에도 정화의 바람이 불었다. 병역을 기피한 공무원 3000명을 전원 해임한다. 이 당시만해도 병역 기피가 공공연하게 만연했다. 첩이 있는 공무원 500여명도 쫓아냈다. 공무원들은 평소보다 30분 먼저 출근해야 했으며 실내 청소와 환경 개조에 앞장서야 했다. 댄스를 금지시켜 춤을 배우던 사람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전국에 ‘나라 재건’ 바람
국가재건최고회의는 6월 11일 재건 국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한뒤 전국에 운동본부를 설치돼 대대적인 국가 재건에 나선다. 이듬해 50여만명의 회원이 확보된다. 재건의 대표적인 게 신생활 재건운동이다. 이는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먼저 혁명 분위기를 깬다며 다방 출입과 커피 판매를 금지했다. 술집 출입도 금지됐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어야 했으며 중고생을 머리를 깎아야 했다. 여성의 일상복은 한복에서 양장으로 바뀌었다. 이 바람에 우리의 한복은 의례복으로 자리잡아 오늘날 한복이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게 됐다. 국민들은 혁명공약을 외우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해야 했으며 교원들은 신사복 대신 국민복을 입어야 했다. 교육 개혁의 바람이 불어 과외와 교내외 특별학습을 금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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