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시리즈3) 5.16은 대체 왜 일어났을까?
(5.16시리즈3) 5.16은 대체 왜 일어났을까?
  • 이두 기자
  • 승인 2021.04.26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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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불신 사회 불안에 초등학생들까지 데모 나서
"나라 바꾸자 " 젊은 소장 장교들의 권력 의지 작동

 

5.16이 일어나기전 깡패와 조폭들의 발호로 사회 혼란상이 극심했다. 5.16후 깡패들이 참회의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5.16이 일어나기전 깡패와 조폭들의 발호로 사회 혼란상이 극심했다. 5.16후 깡패들이 참회의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는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 무엇보다 정치 불신과 사회 불안이 가장 컸다. 날로 좁아드는 군부의 입지에 대한 불만과 소장 장교의 사회 변혁 의지도 결정적 요인이 됐다. 생활고로 힘든 대다수 국민들은 희망없는 삶으로 쿠데타가 일어났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개판 정치
 1960년 4.19 혁명으로 독재자 이승만이 물러나고 민주세력의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웠고 여당인 민주당의 신파, 구파 간의 갈등이 더 심해졌다. 구파에서 윤보선 대통령을, 신파에서 장면 총리를 선출했으나 장면총리는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했다. 이는 구파의 적극 반발했고 서로 불신했다. 결국 구파는 신민당으로 쪼개진다. 윤보선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만 머물려 하지 않았다. 대통령과 총리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했다. 2공화국은 10개월 동안 세 차례나 개각을 했으며 각료들의 평균임기는 두 달이었다. 2공화국의 국정운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5.16을 불러들이는 빌미를 제공한다. 사회 혼란이나 정치 불안을 잠재울 수 없었다.

◆군인 경찰 초등생까지 데모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후 데모는 일상화가 됐다. 시위와 데모로 날이 새는 형국이었다. 장면정부 10개월간 데모만 총 2000여건에 달하고 참가자만 100만여 명에 달했다. 대학생과 각종 단체의 시위는 말할 것도 없고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 경찰, 심지어 국민학생들까지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육군 훈련병들은 장교가 자신들을 무시했다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멈추라는 시위까지 일어났다. 언론들까지 시위를 부추겼다. 제1공화국 붕괴 후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어 일간지는 기존의 41개에서 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증가하고 주간지, 월간지, 통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탄생한 언론들은 혼란스러운 사회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정부나 권력기관을 비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실로 통제가 안되는 나라의 모습이었다.

◆군부 폭발 일보 직전
 군인은 6·25 당시 9만 5,000여명이었다. 휴전 당시에 49만 2,000명으로 늘었으며 1960년에는 70만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했으며, 고급 지휘관들을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당시 최고 식자층이 고급 군인이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반해 인사 적체는 군의 불만을 키웠다. 육군은 6.25 전쟁 이후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승진이 막혔다. 육사 8기생 등 중견 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선배들은 대령 이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 8기부터 대령으로 진급못한 중령들이 많았다. 또한 장면 정부는 경제 개발 추진 명목으로 군을 감축하려 했다. 선거 공약이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이었다. 미국의 반대로 3만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경찰도 된서리를 맞았다. 일제 식민경찰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만 7,000명이 해직됐다.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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