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시리즈5)5.16은 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나
(516시리즈5)5.16은 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나
  • 최용희 기자
  • 승인 2021.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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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당일 지휘소격인 영등포 6관구사령부서 한때 진압군과 대치.
“나라 바꾸자”호소에 진압군 돌아서...한강서 총격전 10여명 부상
5.16당시 지휘소였던 서울 문래동 당시 6관구 사령부 벙커. 이곳에 진압군이 출동했으나 유혈충돌은 없었다.
5.16당시 지휘소였던 서울 문래동 당시 6관구 사령부 벙커. 이곳에 진압군이 출동했으나 유혈충돌은 없었다.

 

5.16은 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나. 많은 국민들이 궁금해한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컸고 사회가 너무 혼란하다보니 오히려 쿠데타를 찬성하는 분위기가 적지않았다.
5.16 작전 개시 당시 유혈사태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장군의 과감함과 진압군의 소극적 대응으로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1961년 5.16 당시 영등포에 있던 6관구사령부는 혁명지휘본부였다. 지금의 서울 지하철 문래역 인근이다. 5월 15일밤 이곳에는 혁명군과 진압군이 섞여 있었다.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 체포하기 위해 육군본부에서 이광선 헌병차감과 헌병 수십명이 와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 작전이 새어나간 사실을 알고도 신당동 집을 출발해 밤12시 조금 넘어 6관구사령부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이곳에서 진압군의 마음을 움직이는 즉석 연설을 한다.

“여러분, 우리는 4.19 혁명후 나라가 바로잡혀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나라꼴입니까? 국무총리를 비롯해 장관들이 호텔방을 잡고 돈보따리가 오고가는 이권운동에 여념이 없습니다. 자유당 정권을 능가하는 부패와 무능으로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는 이 정권을 보다못해 우리는 목숨을 걸고 궐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혁명을 피를 흘려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연설 후 박정희는 진압군 대장 이광선 차감에게 다가가 혁명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어 혁명군의 동태를 감시해야 할 6관구 방첩대장 정명환 중령이 돕겠다고 나선다. 모두가 혁명군이 되는 순간이었다.
연설을 마치고 군이 하나가 됨을 확인한 박정희는 출동 중인 해병 병력을 만나기 위해 6관구사령부를 떠나 해병여단이 있는 김포로 향한다. 염천교에서 트럭 60대에 나눠타고 육본으로 향하는 해병대를 만난다. 김윤근 준장이 이끄는 해병여단 1500여명이었다. 새벽 3시 30분 한강대교에서 혁명군과 진압군이 만난다. 진압군은 헌병들이었다. 이 때 총격이 벌어져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박정희가 차에서 내려 한강다리 중간까지 걸어가 밀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후 큰 저항없이 한강다리를 건너고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점령한다.
5.16 다음날 거의 유일하게 이한림 1군 사령관이 쿠데타에 대한 적극적 저지의사를 나타냈으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반란군의 작전에 말려 힘쓰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5.16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며 박정희는 권력을 잡았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 언론들은 ‘5.16 군사혁명은 무혈혁명’‘올것이 왔다, 무혈혁명’‘무혈혁명, 구국운동’의 제목을 달며 전면으로 대서 특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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