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탄생 140년… 인천서 탈옥, 죄수복 입고 항구 노역도
“백범 체포”일본 현상금 200억…효창공원·인천대공원에 동상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독립”이라고 했던 백범 김구(1876~1949). 올해 탄생 140년이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96년 일본 군인을 살해하고 인천 감옥에 갇힌다. 탈옥해 평생을 조국 독립운동에 몸바친다. 백범을 만나기 위해 서울 효창공원과 인천대공원을 다녀왔다.
◇백범과 인천
백범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소식에 분노해 1896년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다. ‘치하포사건’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 해주감옥에 수감됐다가 인천감영(인천감리서)으로 압송됐다. 인천감리서는 외국인 관련 재판을 맡고 있던 곳이었다.
1898년 3월 19일 백범은 인천 감옥을 탈출한다. 당시 갯벌이었던 인천역 일대를 헤맨 뒤 충청과 전라도서 숨어 생활하다 공주 마곡사서 잠시 승려로 지낸다. 안명근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1911년 체포돼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1914년 인천감옥으로 다시 이감된다. 인천항 부두를 만드는 공사에 동원돼 돌을 나르는 등 노동을 한다. 1915년 인천감옥에서 가출옥한다. 인천은 1919년 상해 망명 이전 백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곳이다. 이같은 인연으로 해방 후 그는 지방도시 가운데 처음 인천을 찾는다.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였다.
백범은 백범일지에 ‘인천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인천 개항장을 통해 유입된 신문물을 익히며 항일운동가로서의 사상을 정립했다’고 기록했다.
◇인천 주민들, 백범 탈옥 계획세워
인천인들도 김구돕기에 나섰다. 재판과정에서 보여준 김구의 의연함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항거가 마음에 와 닿아 그를 적극적으로 구명한다. 헌신적으로 나선 이는 강화 출신 김주경이었다. 그는 강화의 세력가였다. 당시 사람들은 강화의 인물로, ‘양반에는 이건창(李健昌)이요, 상놈에는 김주경’이라 말했다. 또 인천 유생비밀결사의 지도자인 유완무와 순검 김정근은 백범의 탈옥을 모의한다. 유완무는 용감한 청년 13명을 뽑아서 일종의 ‘특공대’를 조직해 한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부순뒤 백범을 구출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김구를 체포”현상금 200억 내건 일본
3.1운동후 백범은 상해로 와 독립운동을 펼친다.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일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중국은 한국 청년들의 기개를 부러워했다. 중국 지도자 장개석은 4억 중국인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한국 독립운동을 돕는다. 일본은 백범이 두 사건의 총책이라고 지목했다.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중국주둔군사령부는 김구 체포를 위해 현상금60만원(현재 약200억원)을 내걸었다. 백범은 미국인 목사와 중국인의 도움으로 피신한다. 백범은 일본군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에 대비해 2층에 항상 비밀 탈출구를 마련해뒀다. 한반도 진격작전을 펼치던 중 광복을 맞이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독립과 남북분단 현실에 기뻐할 수 없었다.
◇백범을 만나려면 효창공원과 인천대공원
서울지하철 5호선 효창공원역 1번 출구로 나와 효창운동장 방향으로 10분정도 걸으면 백범김구기념관(02-799-3431~3)이 나온다. 입장료는 없다. 1층은 개구쟁이였던 백범의 유년시절부터 본격 독립운동 과정, 2층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시기별 활동, 광복후 귀국과 서거 상황을 각종 사진과 자료, 문서로 보여준다. 피살당시 피묻은 윗옷도 있다. 인천대공원에는 백범과 백범 어머니인 곽낙원여사의 동상이 있다. 곽낙원 여사는 백범이 인천 감옥에 있을 때 근처에서 생활하며 자식의 옥살이를 뒷바라지했다. 동상은 외진곳에 있어 눈에 잘띄지 않는다. 2015년 한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월미도 공원으로 옮기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