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시리즈)"일본과 죽어도 국교 안돼" 1964년 6.3 시위 절정

계엄령 선포 후 400여명 구속...이명박 손학규 김덕룡 등이 6.3시위대생

2024-06-03     최용희 기자

 

 오늘(6월 3일)은 1963년 6.3 시위가 일어난지 만60년이 되는 날이다. 1964년 정부는 오랫동안 이끌어오던 한일국교 회담을 타결짓기 위해 본격적인 플랜을 세운다. 정부는 3월 회담 타결, 4월 조인, 5월 국회 비준의 방침을 세운다. 야당과 대학생들은 극렬히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1964년 3월 24일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며 서울 부산 대구에서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벌어진다. 수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진출반대 △일본 경제권 편입반대 △대일청구권의 액수와 조건 비판 △평화선 사수 △문화재 반환요구 △미국의 한일회담 강요반대 △일본에 체류중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소환 등을 요구했다. 시위는 6월 3일 절정에 이른다.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 파출소가 불에타고 군사쿠데타·부정부패·정보정치·매판독점자본·외세의존 등 본질적인 문제제기로 확대, 고조되어 정권퇴진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군사정권과 정보정치 매판독점자본등 박정희 정권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다. 박정권은 밤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민주인사·학생 400여명을 구속했다.

이 때 시위대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한국 정치에 한획을 그은 이명박 전대통령을 비롯해,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등이다. 이들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복역한다. 이명박은 당시 고려대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시위를 이끌었다. 계엄은 7월 29일 풀렸으며 반대시위는 1965년 한일국교 타결때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