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시리즈)'사법권 굳건히' 1964년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별세
이승만의 강한 압박에도 소신 판결...삼권분립 기초 닦아
대한민국의 참된 대법원장이 아쉬운 시대다. 언제부터인가 대법원장이 정권의 손발이 된듯한 안타까운 모습에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지난 문재인 정권 시절 대법원장을 이끌었던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원을 정권의 시녀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법원의 정권 시녀화는 영원히 사법부의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한 압박을 견뎌내며 사법권을 지켜내며 사법권의 초석을 다진 대법원장이 있다. 바로 1964년 세상을 떠난 가인(佳人)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다. 그는 1964년 1월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가 지금까지 추앙을 받는 것은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이 확실히 이뤄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대쪽같았다. 서슬퍼런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 사법권을 지켜냈다.
그는 1948년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해 1957년 정년때까지 활동했다. 1948년에 초대 대법원장 임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로가 김규식 계파라고 여겨 대법원장이 되는 걸 원치 않았으나 국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임명했다. 이후 김병로는 최고 권력자인 이승만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때로는 강력한 소신으로 판결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프락치 사건, 문교부 장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 자신의 정적들이 연루된 사건들이 무죄 선고되거나 형량이 기대에 못 미치자 국회 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고 사법부를 비판했다. 그러자 가인은 자신을 임명한 현직 대통령에게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응수했다. 대법관에게 승용차를 주자는 건의에 가인은 "법관이란 집에서 법원에나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것인데 차는 해서 무엇 하냐"며 거절했다. 양복 대신 두루마기를 입었고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1957년 퇴임하면서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는 말을 남겼다. 정년퇴임 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5.16 반대 등 잠시 정치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가인은 1910년대 일본 메이지대학과 니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후 귀국했다. 이후 경성전수학교,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일제강점기에는 변호사로서 독립운동가를 무료변호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 사건, 의열단 사건, 6·10만세사건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변호사와 신간회원으로 활동했다. 창씨 개명을 거절해 오랫동안 야인생활을 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는 사법부장(현 법무부장관)을 맡아 초기 사법부 구성과 기본 법률 제정에 앞장섰고 1948년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해 9년4개월간 사법부의 기틀을 세웠다. 재임시절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 기본 법률의 초안을 닦은 업적이 있다.
대법원 홈페이지에는 그의 업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하여 사법부의 기틀을 다지고,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민법·형법·형사소송법 등 기본 법률안을 기초하였다. 소신 있는 법관, 강직한 공인으로서 자세를 철저히 지켰으며, ‘법조인의 스승’, ‘사법부의 초석’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