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들에게 '아, 잊지못할 실미도 사건',

국방부 53년 만에 유족에 첫 사과키로 시대의 아픔 1000만 관객 이끈 영화로도 만들어져

2024-08-21     최용희

 

 

 중장년들은 1971년 일어난 실미도 사건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초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중장년들은 그 때만 해도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와 버스를 탈취해 인천과 부천을 거쳐 서울 대방동을 달려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의 실미도 사건은 이렇다. 당시만해도 실미도는 어디에 붙어있는 섬인지도 모를 때였다 .
 실미도 부대는 1968년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와 공군이 북한에 똑같은 본때를 보여주기위해  창설한 부대였다. 3년여의 극한 훈련을 받은 공작원들은 갑자기 남북관계 개선으로 자신들이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찬반신세가 됐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공작원 24명은 1971년 8월 23일 인천 중구 무의동(당시 경기 부천군 용유면)의 실미도 부대(공군 제2325부대 제209 파견대)에서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탈출했다.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서울 대방동의 유한양행 건물 인근에서 군경과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으로 인해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 공작원 20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대의 아픔이었다.

국방부는 53년 만에 '실미도 사건'을 사과하기로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9~10월 유해 발굴 개토제에서 신원식 국방장관의 사과가 전해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개토제는 묘지 조성을 위해 땅을 처음 팔 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당시에 살아남았던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를 거쳐 이듬해 경기도 벽제 인근에서 사형당했다. 군은 이들 시신을  암매장했다. 교전 중 사망 20명 유해는 2005년 발굴했지만, 국방부는 지난 5월 남은 4명에 대한 발굴 착수 방침을 발표했다.
실미도는 2003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1000만명이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시청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이로 인해 실미도 사건이 새롭게 조명됐다. 국민배우 안성기가 교관, 허준호가 중간 교관으로 나왔고 지금 텔레비전에서 어벙하지만(?) 인기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임원희가 극한훈련을 견디는 공작원 역할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