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행사를 해병대가" 목소리 커져
매년 9월15일 전후 월미도서 재현..."노르만디상륙에 버금가는 작전"
해병대 예비역들이 매년 9월 15일을 전후해 인천 일대에서 펼쳐지는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행사를 해병대 주관으로 개최하라고 최근 촉구했다. 인천상륙작전 행사는 지금까지 국방부가 주최하고 인천시와 해군본부가 주관해왔다.
'해병대 독립단'이라고 밝힌 해병 예비역 20여명은 인천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주관 기관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며 인천상륙작전은 해병대 혼이 서려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 그 자체"라며 "기념행사를 해병대 주관으로 당장 이양하라"고 촉구했다.
올해도 인천 월미도 앞바다 등 곳곳에서 재연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매년 15일을 전후해 인천 일대에서 재연된다. 군함과 상륙정을 비롯해 비행기가 동원된다. 현역장병들도 참가해 상륙 당시를 재현한다. 참전용사들의 시가행진도 펼쳐지고 일반인들이 함정을 타보는 등 각종 안보 체험행사도 진행된다.
상륙작전은 30분에서 1시간정도 재연된다. 월미도 앞바다에서 여러 척의 배가 작전을 펼치고 하늘에 연막탄을 쏘며 당시의 생생했던 분위기를 보여준다. 해안가 지형을 살피기 위한 정찰부대의 작전이 개시된다. 고무보트들이 월미도 앞바다에 나타나면 상공에 떠있는 헬기에서 낙하산을 멘 수색대원들이 바다 속으로 떨어져 고무보트에 올라탄다.
정찰부대 작전이 끝나면 함정들의 공중화력 시범이 이어진다. 월미도 앞바다 여러 곳에 설치된 수중폭발물이 터지면서 불기둥과 물기둥이 번갈아 바다 위로 치솟아 오른다. 월미도 앞을 메운 검은 연기가 채 가시기 전, 전투기의 굉음이 들린다. 이어 해병대원들의 상륙이 시작된다. 상륙군이 차례대로 상륙정에서 뛰어나오면서 암벽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신속하게 올라간다.
◇월미도 만석동 용현동서 기습
1950년 9월 15일 새벽 미국과 영국, 호주, 프랑스 등 8개국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순양함 등 261척의 함정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했다.
이날 새벽 5시부터 함포사격과 함께 상륙작전이 시작됐고, 6시 33분 선발대가 월미도(Green Beach)에 상륙했다. 정오쯤에는 월미도 일대에 있던 북한군을 섬멸하고 주변을 장악했다. 이어 오후 5시 32분 후발대인 미 해병 1연대가 지금의 남구 용현5동 일대 해안(Blue Beach)에, 5시 33분에는 미 제5해병연대가 동구 만석동 부근(Red Beach)에 상륙했다. 국군 해병 1연대도 오후 8시 만석동 부근에 상륙해 시가지 소탕전과 외곽 경비를 맡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이날 작전에서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1만3000여명이었으며,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의 피해를 보았다. 인천을 교두보로 확보한 미 해병 제1사단은 16일부터 서울로 진격했다. 후발 부대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인천에 상륙해 서울수복 전투에 가세함으로써 9월 28일 마침내 서울을 탈환했다. 이로써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단번에 바꿔놓은 역사적인 작전으로 기록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 당시 순식간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상황에서 북한군의 배후를 쳐 위기에서 벗어나자는 구상으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인천과 군산, 주문진 등 3곳을 대상으로 검토하다가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결정으로 인천이 최종 선택됐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10여m나 돼 상륙작전에 적합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서울과 가깝고, 서울 탈환은 북한군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줄 수 있으며, 남한 깊숙이 들어온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기에도 좋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데이비드 리즈(Rees)는 로마군 5만명을 전멸시킨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의 '칸나에 전투'(BC 216년)에 빗대 인천상륙작전을 '20세기의 칸나에 전투'라고 평했다. 일부에서는 노르망디상륙작전에 버금가는 작전으로 여기기도 한다.
◇맥아더 동상과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은 1957년 세워졌다. 월미도에 세우려 했으나 사람이 많이 찾는 자유공원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와 민주수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과 인천 두 곳에 동상을 세웠다. 서울 광화문의 동상은 언제 철거되었는 지 알 수 없다. 인천자유공원의 원래 이름은 만국공원이었다. 맥아더 동상이 세워짐과 함께 이름이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다. 1964년 그가 눈을 감자 서울에 빈소가 차려졌다. 한때 맥아더를 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있었다.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차례 만났으며 사이가 좋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때와 1950년 서울수복 환영 행사때 함께 참석했다. 6.25 바로 직후 맥아더는 이승만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무기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맥아더 동상은 10여년전부터 이념 충돌의 장이 되었다. 2004년 진보단체가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면서부터다. 특히 상륙작전일인 9월 15일을 전후해서는 보수와 진보 단체가 잇달아 집회를 가지며 철거와 보존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06년에는 미국의회가 맥아더 동상을 본국으로 갖고 가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기도 했다. 매년 9월 15일을 전후해 월미도 앞바다에서는 상륙작전 재현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