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함락된 적 없는 천혜의 요충지

백제 온조왕 성터...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

2017-10-25     이두 기자

 

  병자호란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 성남, 하남 일대에 걸쳐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당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반해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고 적의 접근이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로써 단 한 번도 전투 중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또한 내부 면적이 넓어 각종 시설이 들어서게 되는데,
 특히 남한산성 행궁은 조선시대 20여개의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까지 갖춘 시설이 들어설 정도였다. 인조에 의해 대대적인 수축사업이 이루어진 뒤에도 조선 후기까지 지속해서 정비가 이루어져 우리나라 산성 중 각종 시설이 잘 완비된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됐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다. 이미 1627년 정묘호란때 한 차례 강화도로 피신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청이 알고 강화도로 가는 길을 봉쇄했다. 강화도에는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이 있었다. 당시 원로대신이었던 김상용은 종묘사직 신주와 빈궁, 원손들을 데리고 미리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청 군대가 공격한지 하루만에 1637년 1월 강화도가 함락된다. 77세인 김상용은 자결을 결심한다. 강화도 남문에 있는 화약고에서 13세 손자를 끝어안고 함께 순사했다. 김상용은 죽기 전 동생 김상헌에게 인조가 강화도로 오지 못하고 남한산성을 갔다는 글을 하인을 통해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