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포구는 과연 다시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까

화재 딛고 현대화 추진...1970년대 소형어선· 상인 포구로 몰려 본격 어시장, 전국 명성

2018-03-28     시니어오늘 기자

1937년 수인선 개통, 해방 후 실향민 몰려 포구 형성
지난주에 찾아간 소래포구는 평온했다. 수산물 가게 일대에서는 여전히 흥정과 매매가 이뤄졌고 주위 공원이나 포구일대에는 운동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상인들은 날씨가 풀려 주말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해 화재가 났던 어시장 지역에는 펜스가 처져있었다. 펜스 안을 들여다보니 화재가 났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소래포구 현대화 사업 결정이 확정돼 지금 작업 중이다. 소래포구는 올해 안에 다시 새롭게 태어나 수도권의 명소로 부활할 수 있을까.

◆수도권 대표적 명소
 소래포구는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서해안가 어항이자 포구이다. 20여년전만해도 수산물 생산 판매가 이뤄지는 포구로서 명성을 날렸다. 지금은 주변이 완전히 개발돼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포구 위로 수인선 전철이 달리고 있다. 포구에서 인천 앞바다까지 마치 아파트 사이로 어선이 오간다. 이전의 소래포구는 그런대로 보존돼 어시장이 남아있다. 소래포구에는 어시장, 수산물 공판장, 횟집 등이 밀집해 있다.
 100여년전 작은 나루터에 불과했던 소래는 1934년 소래염전이 들어서고 1937년 수인선이 개통하면서 새롭게 변신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산 소금과 어패물이 수인선을 통해서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해방 이후 고향에 갈 수 없는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작은 규모로 어패류를 생산하면서 포구의 모습을 갖춰나간다.
 1974년 인천 내항이 준공하면서 내항에 머물던 새우잡이 배들이 대거 소래포구로 몰리면서 소래는 새로운 어시장으로 발전한다. 점차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 현재는 수도권 휴양지이자 어항으로 성장하여 관광 명소로 유명해져서 수산물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붐벼 북새통을 이루었다. 수도권 대표 어항인 소래포구는 신선하고 저렴한 새우·꽃게·젓갈로 명성을 크게 얻으며, 그 동안 대한민국의 100대 관광지 중 한 곳으로 발돋움했다. 방문 연인원은 1500만 명에 달한다.
 소래포구는 오랫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바가지와 호객, 불친절한 상행위로 찾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난해 화재가 났을 때도 전체적인 사회 여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자승자박이라며 좋지않는 시선을 직접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소래포구는 수인선 전철을 이용하면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갈 수 있다. 수인선 소래포구역에서 내리면 포구는 물론 어시장과 인천 앞바다 등도 구경할 수 있다. 1994년까지 구 수인선 협궤열차가 다녔던 소래철교는 이제는 시민들이 소래와 시흥을 걸어서 오가는 다리로 이용되고 있다.
◆화재 극복하고 현대화 추진
 지난 2017년 3월 어시장 내에 화재가 발생하여 좌판 220여개, 상점 20여채가 불에탔다. 해안가 쪽에 있는 허름한 좌판 상점의 3분의 2나 전소된 대형 사고였다. 화재에 대한 경고를 받았으나 남동구 측에서 소래포구 어시장에게 관련 소식을 통보하지 않고 지난 3년 간 묵살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인천 남동구는 최근 소래어시장 현대화사업 개발 방향을 ‘기부채납방식(조건부)’으로 결정했다. 소래어시장 현대화 사업은 화재로 소실된 소래포구 어시장 부지인 논현동 111-168일원에 건축 연면적 3457㎡ 규모로 수산물 소매 판매시설을 신축하는 사업이다.
 남동구는 현대화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로부터 어시장 부지 소유권 이전을 완료했으며, 상인들에게도 현대화 사업 추진 설명회를 열었다.
 소래포구 현대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과연 이전의 '수도권 명소'라는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소래포구 어시장 관계자는 "그동안 소래포구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질 좋은 수산물은 변하지 않았다"며 "현대화 사업을 계기로 불법 좌판이 모두 사라지고 상거래 질서가 확립된다면 고객들은 다시 소래포구로 발길을 돌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소래포구와 함께 한 수인선… 전철로 부활
 수인선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8월 남인천과 수원 구간을 오가며 운행을 시작했다. 민족의 애환을 담은 추억의 열차로 ‘꼬마 열차’라고도 불렸다. 소래 염전과 나오는 소금과 내륙의 쌀을 운송해 일본으로까지 수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인선은 1970년대 소래포구가 새우 파시를 이룰 때 사람들을 실어나르며 소래포구를 전국에 알리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1970년대부터 시외버스 등 교통 수단의 발달로 이용객이 크게 줄어들었다. 1995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운행을 멈췄다. 협궤열차가 다니던 소래포구 일대의 수인선 구간은 시민들이 걸어서 산책하는 길로 바뀌었다. 바닥에 철로만이 남아있어 수인선 흔적임을 보여준다. 바로 옛 수인철로 옆에 새로 개통된 수인선 전철이 아파트와 대형 상가 건물 사이로 시원하게 달리고 있다. 소래포구역도 새로 생겼다. 소래포구 옆에는 소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소래역사관이 있다. 소래갯벌과 수인선, 소래염전, 소래포구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관 앞에는 수인선을 달리던 증기기관 열차가 서있다.
 

◆다양한 소래 지명 유래… 소정방이 왔다는 설은 타당성 없어
 소래역사관은 소래포구 지명 유래를 알려준다. 소래의 지명 유래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는 먼저 ‘가늘다’‘좁다’‘뽀족하다’는 등의 뜻을 갖는 우리말 형용사 ‘솔다’에서 나온 지명을 본다. 소래산을 비롯해 오봉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퍼져있는만큼 산봉우리의 뾰족함 때문에 ‘솔-’을 이름에 사용해 소래가 되었다는 유래다. 또한 이들 산과 주변 냇가에 소나무가 많기 때문에 ‘솔내’로 불리다가 소래로 변형되었다는 설, 높은 곳 또는 맨꼭대기를 뜻하는 우리말 ‘수리’에서 발음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소래라는 이름의 유래를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과 관련하여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도래에서 찾고 있다.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중국 산둥반도의 래주에서 출발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를 살펴보면 소정방은 덕적도에서 백제 남쪽인 기벌포로 상륙하였을 뿐, 소래로 상륙햇다는 내용은 없다. 결국 소정방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은 재미는 있을지 모르나 타당성은 없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