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 율곡이이마을 조성...율곡 어려서 파주서 자라

호 ‘율곡’ 은 파주 율곡리서 따와, 자운서원 화석정 등 유적지 많아

2018-04-04     김현정 기자

 파주시가 파평면 율곡리 일대에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1의 생가를 복원하는 등 율곡마을을 만든다고 한다. 이이는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여섯 살 때쯤 파주로 와 생활했다. 이이의 호인 율곡은 그가 자라난 파주 파평면 율곡리에서 따왔다. 율곡리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한 곳이다.
◆조선 대표적인 성리학자
이이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사회 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했다. 1564년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모두 아홉 차례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으며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ㆍ 병조ㆍ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조선 유학계에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대동법, 사창실시 등에 노력하였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살때 이미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화석정시’와 1545년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경상북도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론에 관해 토론하기도 했다.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과거 시험에서 율곡이 지은 ‘천도책’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이이는 선조에게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군사에게는 호별세를 면해주고 무술을 단련시키며 6개월 만에 교대로 서울을 지키도록 하다가 변란이 일어날 때는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는 등 위급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만언봉사에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인정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은 나라에 의거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거한다. 백관을 창설하고 여러 직책으로 가른 것은 오직 민생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민본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건적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1569년 저술한 동호문답의 '논안민4년에 상소한 만언봉사에서도 상하가 서로 믿는 성실이 없는 것과 .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는 성실이 없는 것 등 7가지의 병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폐단이 만연된 당시의 사회를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당시의 보수적 집권층과는 달리 시대의 상황에 따른 법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제도라도 오래 지나면 폐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조정의 성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이의 어머니로 한국의 대표적 여성상인 신사임당(1504∼1551)은 강릉에서 태어났다. 결혼후 시댁의 오랜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하며 이이를 키웠다. 사임당은 어려서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으며, 7세 때 이미 산수도(山水圖), 포도도(葡萄圖)를 그렸는데,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는 그의 화풍은 따를 자가 없었고, 필법(筆法)도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로서, 그리고 교양과 학문을 갖추고 천부적 소질을 발휘한 예술가로서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다.
 파주에는 이이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내에는 가족 묘역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이 자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가족 묘역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노씨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이 중심묘역을 이루며 그 외의 가족묘 등 모두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자운서원
 자운서원은 1615년(조선 광해군 7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어 효종 원년(1650) ‘자운(紫雲)’이란 현액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1713년(숙종 39년)에 선생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1683년 (숙종 9년)에 건립된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와 ‘이이선생 신도비’ 유적등이 있으며 율곡 선생의 유품 및 일대기를 전시한 율곡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1973년 자운서원, 율곡이이묘, 신사임당묘가 각각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율곡이이 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사적 제525호“파주 이이 유적”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1868년 (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만 남아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 위에 세워졌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음력 8월 제향을 올리고 있다.
 

◆율곡이 어린 시절 학문 익혔던 화석정
화석정(花石亭)은 율곡 이이가 태어나기 전인 1443년(세종 25)에 5대조 할아버지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짓고, 1478년(성종 9) 율곡 선생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몽암(夢菴) 이숙함(李淑諫) 선생이 화석정이라 이름 지었다. 율곡이 어린 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율곡은 국사 중에도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시와 학문을 전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간 그 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율곡 선생의 후손들이 다시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지역 유림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였으며,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 사업의 일환에 따라 화석정을 단청하고 주위도 정화하였다. ‘화석정’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 내부 뒷면에는 율곡 선생이 8세 때 지은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花石亭 (화석정)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숲풀 속 정자에는 가을이 짙고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하늘 닿은 물빛은 더욱 푸르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마냥 붉어라

山吐孤輪月 (산토고윤월) 산 위에는 둥근달 솟아오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강물은 바람결에 일렁이는데

塞鴻何處去 (색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나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날 저문 구름 속에 울음 끊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