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연평도...오랫동안 남북대치로 가슴졸여(서해5도 시리즈)
서해 NLL 갈등으로 해전… 최근 통신선 회복 등 평화의 바람
연평도 일대는 '한반도의 화약고’로 불릴 정도로 남북 군사 대결이 첨예하게 펼쳐졌다. 지난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전에도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건이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이다. 해전이 일어날 때마다 연평도 어민들은 대피소로 피난해야 했으며 어업활동이 금지되는 등 일상 생활이 위협을 받아야 했다.
◆1999년 1차 연평해전
1999년 6월 7일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 서북쪽 10㎞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3척이 어선을 보호한다며 북방한계선을 3.5㎞ 침범했다. 다음날에도 북한은 경비정 4척과 어선 10척을 북방한계선 남쪽 9㎞까지 침범했다. 해군은 고속정을 접근시켜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따라 퇴각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경비정 3척을 추가 투입해 전적인 행동을 계속하였다. 6월 9일에는 북한 고속정이 대한민국 해군의 고속정을 충돌하여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북한 경비정의 침범이 계속되자 해군은 6월 11일 북한 경비정 4척에 대해 선체 뒷부분을 부딪치는 ‘함미(艦尾) 충돌작전’으로 맞섰다.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은 계속됐다. 6월 15일 오전 8시 45분경 북한 경비정 7척이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하여 충돌공격을 실시하고, 이에 맞대응하여 대한민국 해군도 충돌 공격을 했다. 양측간에 혼전이 벌어지던 중 오전 9시 28분 북한 함정이 먼저 사격을 가해왔다. 대한민국 해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 사격을 했다. 쌍방간의 교전은 오전 9시 42분까지 14분간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이 격침되고 5척이 크게 파손 당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반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월드컵 한창 때 2차 연평해전
제1차 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2002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북한은 북방한계선을 침범해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이날 오전 9시 54분부터 북방한계선을 넘기 시작한 북한 경비정들은 10시 25분 근접차단을 실시하던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도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대응사격을 개시하는 한편 인근의 제천·진해함(PCC)과 참수리급 경비정 4척을 투입해 대응 사격에 나섰다. 교전은 오전 10시 56분까지 31분간 진행된 후 북한의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 북으로 퇴각함으로써 무력 대결이 끝났다.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은 해군의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되고, 정장인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한상국 상사 및 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했으며 18명이 부상했다. 북한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정부는 2008년 4월 ‘서해교전’으로 불리던 이 전투를 ‘제2연평해전’으로 명명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정부는 2016년부터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도발에서 서해를 수호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3월 넷째 금요일을 ‘서해수호의 날’로 지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2018년 8월 제2연평해전 전사자(6명) 유족에게 추가보상금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추가보상금은 전사자 1인당 1억4400만원~1억8400만원이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는 2002년 당시 '일반순직'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7월 17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전사' 기준에 상당하는 보상금을 추가로 받게 됐다.
피우진 보훈처장은 강원도 홍천에 거주하는 고(故) 박동혁 병장의 부모를 직접 찾아가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박 병장은 제2연평해전 당시 2함대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으로 근무하다 전사했다. 박 병장 외 5명의 전사자에 대해 해당 지역 보훈지청장들이 직접 유족을 만나 추가보상금을 지급하고 위로할 계획이라고 보훈처는 전했다.
◆서해 군사 충돌 왜 자주 일어나나
1951년 11월 군사분계선 설정 당시 육상경계선에 대한 양측 합의는 이루어졌으나, 동서 해안의 해상경계선에 대해서는 남북한 사이에 명시적인 합의가 없었다. 이에 유엔군은 서해상에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영해 기준 3해리를 고려하고 연평도·백령도 등 5개 도서와 북한지역과 개략적인 중간선을 기준으로 북방한계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북한은 유엔군의 일방적 조치라며 그 효력을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해상에서 수시로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며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은 연평해전을 계기로 교전규칙을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인 응전 개념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시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대응에서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3단계 대응으로 바뀌었다.
◆제2 연평해전 윤영하 소령 모교 송도고서 매년 추도식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윤영하 소령의 16주기 추모식이 최근 고인의 모교인 인천 송도고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박상은 추모사업회 이사장, 민경욱 국회의원, 인천보훈지청장, 인천해역방어사령관, 송도고 재학생 등 약 50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교정에 건립된 윤 소령의 흉상 앞에 헌화하고 고인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며 묵념했다. 윤영하 추모사업회 박상은 이사장은 헌사에서 "윤 소령이 보여준 살신성인의 진정한 호국정신은 1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살아있는 교훈으로 우리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윤 소령은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침범해 기습공격을 할 당시 우리 해군의 참수리 357정 정장이었다. 이 전투로 윤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했다.
해군은 윤 소령을 기리기 위해 미사일 고속함 윤영하함을 건조했으며 윤 소령의 부친이자 해군사관학교 32년 선배이기도 한 윤두호씨를 명예 함장으로 위촉했다.
◆서해지구 남북 군통신선 29개월만에 완전 복구
남북화해 분위기는 서해에도 평화의 바람을 몰아오고 있다. 지난 7월 16일 서해지구 남북 군통신선이 완전히 복구됐다. 국방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서해지구 군 통신선은 2016년 2월 11일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단절된 이후 29개월 만에 복구됐다"며 "지난 1월 9일 이후 동케이블을 이용한 육성통화만 가능했으나 현재 동케이블 외에 광케이블을 통한 유선통화 및 팩스 송·수신도 가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서해지구 군 통신선 복구를 위해 광케이블 전송장비 구성품과 문서교환용 팩스 등을 북측에 제공했다. 남북은 지난달 16일 제8차 장성급군사회담과 지난달 25일 통신실무접촉에서 이를 합의한 뒤 유엔 안보리와 미국의 협의를 거쳐 군 통신선 복구를 위한 물품을 제공했다.
국방부는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선언' 이행의 일환으로 서해지구 군 통신선이 완전 복구돼 정상화됨에 따라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