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남 탄생시킨 '광주대단지 사건' 재조명
성남시 ‘폭동’ ‘난동’ 오명 벗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추진...1971년 무리한 이주에 집단 저항
성남시가 47년 전인 1971년 서울 판자촌 주민 집단이주 과정에서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 재조명 작업을 다시 검토하고 나섰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1년 서울시 무허가 판자촌 철거계획에 따라 경기 광주군 중부면(현 성남시 수정·중원구. 1973년 성남시로 분리) 일대에 조성한 광주대단지에 강제로 이주당한 철거민 10만여명 중 수만 명이 생존권 대책을 요구하며 벌인 집단 저항이었다. 성남시는 오래전부터 광주대단지 사건 재조명과 당사자들의 명예회복을 추진해왔다. 은수미 성남시장이 취임하면서 재조명을 다시 시도하고 있다.
◆시가 앞장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은수미 성남시장은 지난 8월 22일 페이스북 글을 통해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47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면복권조차 이뤄지지 않은 22명의 행방을 찾았다.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 규명과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다. 당시 사건으로 주민 22명이 구속됐고 미성년자 1명과 무죄 확정을 받은 1명을 제외한 20명이 처벌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폭동' 또는 '난동'이라는 오명이 붙었다. 은 시장은 "강제 이주한 여러분의 이야기가 성남시의 역사이고 뿌리"라며 "최소한 여러분의 이야기를 기록이라도 할 수 있게 연락해달라"고 했다.
시는 광주대단지 사건은 기록마다 '폭동', '난동' 등으로 제각기 달리 표현하고 있는 데다 사건 성격이나 의미도 규정짓지 못한 채 묻혀 있어 재조명을 위해 가능한 방법들을 찾아볼 계획이다. 이를 위해 시의회가 번번이 부결시킨 지원 조례 제정을 재추진할 방침이다. 시 관계자는 "정부와 사법기관이 당시 형사처분한 사안을 지자체가 나서 진상을 규명하려는 것은 국가 사무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등 여러 이유로 시의회가 수차례 관련 조례안과 특별위원회 구성 건을 부결시켰지만, 다시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부와 정치권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조사 필요성을 지속해서 건의하고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사무 범위 안에서 실태 파악과 이를 위한 지원 활동 등을 담은 조례 제정도 검토할 계획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은 지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지난 2017년에는 국회에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욱(성남분당을) 의원은 "광주대단지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잘못된 도시 주거정책과 억압적 행정의 생생한 증거이자 이에 저항한 도시봉기, 성남주민운동의 출발점"이라며 "지난 정권과 언론에 의해 덧씌워진 ‘폭동’과 ‘난동’의 이미지를 벗기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자리매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민 5만여명 분노 폭발
광주대단지 사건은 강제로 이주당한 철거민 10만여명 중 5만 여명이 1971년 8월 10일 생존권 대책을 요구하며 벌인 집단 저항이었다. 서울시는 1968년부터 서울시내 무허가 판잣집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현 성남시 수정·중원구. 1973년 성남시로 분리) 일대에 위성도시로서 광주대단지를 조성,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당초 서울시는 강제 이주시킨 철거민들에게 1가구당 20평씩 평당 2000원에 분양해주고 그 대금을 2년 거치 3년 상환토록 했다. 그러나 토지 투기붐이 일면서 6343가구의 전매 입주자가 정착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자, 이들에게 평당 8000~1만 6000원에 이르는 땅값을 일시불로 내게 한 데다 취득세·재산세·영업세·소득세 등 각종 조세를 부과했다.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엔 5만여명의 주민이 몰려 들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11시에 주민대표와 양택식(梁鐸植) 당시 서울시장이 면담하기로 예정된 시간에 앞서 그들은 ‘배가 고파 못살겠다’, ‘일자리를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웅성거렸다. 양 시장은 약속시간에 오지 않았다.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주민들은 관리사무소, 출장소를 불태우고 차량 20대를 불태웠다. 전투경찰 700명이 투입되었지만, 저지하지 못했다. 첫날은 경찰과 5시간 대치했다.
주민들은 이후 광주대단지를 초토화시킨 후 주변을 지나가던 승용차, 택시, 버스들을 가로막아 멈춰세운 뒤 탑승객들을 모조리 끌어내고 탈취했다. 그들은 차량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시위는 사흘 동안 진행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내무부 차관과 경기도지사를 현장에 보내 주민들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다. 아울러 주민 대표들에게 정식 사과했다. 8월 12일 양택식 서울 시장은 담화를 통해 광주대단지(성남출장소)를 성남시로 승격시키고,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약속했다. 이로써 시위는 3일만에 진정되었다. 이 사건을 광주(廣州)대단지사건이라 부른다.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백여 명이 부상하고 주민 23명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2년 뒤 광주대단지는 성남시로 승격돼돼 지금의 인구 100만명에 육박하는 대도시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연극 ‘황무지’ 광주대단지 사건을 알리다
한국 산업화의 모순이 폭발한 지점이자 성남시의 태동이 되었던 1971년 8월 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을 다룬 연극이 최초로 무대에 올랐다. 성남의 한 극단이 지난 8월 4일과 5일 6시 성남아트센터 앙상불시어터에서 광주대단지의 다른 이름 ‘황무지’를 무대에 올렸다. 황무지는 지난해에 이어 2번째로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으로 올해 연극에서는 ‘황무지’는 ‘아이의 눈’을 통해서 본 광주대단지의 처참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광주대단지의 상황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여주어 관객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극단 성남93 대표는 "광주대단지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은 황무지가 처음이다“라며"황무지를 통해 광주대단지사건의 의미를 돌아보는 공연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공연은 지역언론인 성남일보가 주관하고 극단 성남93이 주최해 진행하는 공연으로 지난해부터 5부작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소설 속 배경으로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7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윤흥길의 중편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배경이 되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을 통해 도시 소시민의 위선과,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미명하에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경찰의 보호관찰 대상자이자 시위사건 주동자였던 권씨가 학교 교사인 오 선생의 문간방으로 이사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참담한 고생 끝에 경기 성남 시청 뒷산 은행주택을 산 다음, 자그마치 100평 대지 위에 슬라브 집을 지은 오 선생. 그의 집에 권(안동 권)씨네가 문간방으로 이사하던 날. 그 풍경이 가관이다 못해 장관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화이트 컬러 노동자의 상징인 구두. 권씨는 문간방에 살망정 반짝이는 구두를 신는다. 어쩌면 그에게 구두는 지식인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도시 빈민으로 이리저리 밀려다닐 처지인 그가 남겨진 아홉 켤레의 구두를 통해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돌아오지 않는(떠나간) 한 켤레의 구두는 무엇을 의미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