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면 찾는 팔미도 등대, 1903년 세워진 한국 최초 등대
신년이면 찾는 팔미도 등대, 1903년 세워진 한국 최초 등대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8.01.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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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캐릭터로 새로 선정돼, 한국전쟁 당시 불 밝혀 인천상륙작전 이끌어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 인천시는 최근 등대와 점박이물범을 캐릭터로 선정했다.

  인천시는 최근 등대와 점박이물범을 인천을 대표하는 새로운 캐릭터로 선정했다. 지난 21년동안 두루미가 인천의 캐릭터였다. 시는 지역의 특성을 더욱 살리고 미래를 밝히자는 취지에서 등대와 점박이물범을 새로운 캐릭터로 지정했다.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10여km 떨어진 곳에 팔미도란 섬이 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인천대교를 지나다 보면 섬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 등대가 있다. 팔미도 등대다. 1903년 6월에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당시 소월미도 등대와 함께 처음으로 불을 밝힌 등대로 건립되었다. 서해와 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하여 해상 교통의 중심으로 기능하였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오랫동안 민간인 통제가 되었던 팔미도는 10여전부터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특히 해가 바뀌는 신년초가 되면 많은 관광객들이 팔미도를 찾아 일출을 구경하며 새해 힘찬 출발을 다짐하기도 한다.
◆인천 연안부두서 배타면 보여팔미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10㎞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인근에 있는 무의도와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 '여덟 팔(八)'자처럼 보여 팔미도라 이름이 지어졌다. 서해안에 흩어져 있는 1백여 개의 무인도 가운데 인천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등대는 이곳 해발 71m 정상에 서 있다. 등대의 높이는 7.9m다. 일인들이 세웠을 당시에는 90촉광짜리 석유등으로 등대를 밝혔다고 한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외국배가 인천 앞바다를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필요해졌다. 인천 앞바다에서 선박간 충돌을 피하고 항로를 밝혀주고 등대가 필요해졌다.
 팔미도 등대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건설 기술이 변화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목조 중심의 전통 건축 방식에서 벽돌, 돌, 콘크리트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바다에서부는 바람에 저항하는 구조를 갖추면서 등명기 렌즈를 관리하는 광학기술 등이 반영되었다. 근대 공학 기술의 도입과 적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등대로 알려져 있다. 등대는 콘크리트와 석조를 함께 사용하여 지었다. 높이는 등탑 윗부분의 등명기를 포함하여 7.9m에 달하며, 평면은지름 4.67m의 원형이다. 출입구는 돌로 쌓아 육중한 느낌을 주고, 나무로 만든 오르내리창과 직선의 철제 사다리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특히 당시에 사용하였던 등명기에는 제작지인 파리와 제작회사 이름이 남아 있다.
 당시 인천항은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이 복잡해 입출항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인들은 프랑스 표지 회사의 기술을 이용하여 착공 1년 1개월 만에 등대를 설치했다. 일인들은 이 등대를 러일전쟁에 이용했다.
 90여 년 전인 그때만 해도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보이는 불빛이란 도깨비불밖에 없었다. 어부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그것도 섬 꼭대기에 밤새 켜져 있는 불빛을 보고 주저하지 않고 도깨비불이라고 했다 한다.
 팔미도 등대가 제대로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 관할기관이 교통부로 바뀌고 나서였다. 이때 처음으로 렌즈의 내경이 300mm, 초점거리 150mm인 백열등이 자가발전 시설로 설치됐다. 이때의 밝기는 9000 촉광이었다. 처음으로 안개 신호기를 설치돼 비로소 제대로 된 등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63년에는 이 등대에 무선표시국을 설치했고, 1967년에는 무선전화를 들여오는가 하면, 등명기를 백열등에서 수은등으로 교체했다. 또한 부대시설을 새롭게 꾸몄는데, 이는 60여 년 동안 해풍을 견뎌오면서 낡은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등명기 교체와 부대시설 개조는 팔미도 등대를 현대화시키는 첫 단계였다.
 이어서 1981년에는 등명기를 다시 할로겐 램프로 교체했으며, 1991년에는 태양광 발전장치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절대적 역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사령관은 9월14일 저녁 7시에 ‘9월15일 0시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는 작전 명령을 내린다. 암호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였다.
 한미연합특공대가 5시간 치열한 전투끝에 인민군이 점령한 팔미도를 탈환, 15일 0시12분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빛을 밝힌다. 이 작전의 성공은 한국의 '캘로(KLO)' 특공대와 미 해군 클라크 대위가 숨은 공로자다.
 예정 시간을 조금 넘겨 망원경에 등대 불빛이 들어오자, 맥아더 장군은 인천만 외항 멀리에 집결한 261척의 유엔군 함대에 발진명령을 내린다. 연합함대는 팔미도 등대 불빛에 의존해 1차 목표지점인 Green Beach(월미도)에 안전하게 상륙한다. 이어 Red Beach(동구 만석동)과 Blue Beach(남구 용현5동)을 점령하고 인천 해안교두보를 확보한다. 한강을 너머 서울을 탈환하고, 전황을 역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한 작전이었다.
팔미도등대는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에 불과하다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시키는 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 섬 전체가 바위로 이뤄진 팔미도는 오랫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으나 2009년 '인천방문의 해'부터 본격적으로 관광객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팔미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넓게 펼쳐진 서어나무, 소사나무 군락지 사이로 둘레길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를 거닐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해가 질 즈음에는 인천 8경 중 하나로 꼽히는 환상적인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팔미도에는 누구나 출입할 수 있으며, 인천항 연안부두에서 출발하는 팔미도행 유람선을 이용하면 약 50분가량 소요된다.

◆팔미도 일대서 내년 '바다의 날' 기념식
인천시는 내년 5월 31일 열리는 '제23회 바다의 날' 기념식 개최도시로 확정됐다고 최근 밝혔다. 2003년 개최도시였던 인천시는 15년 만에 다시 바다의 날 기념식을 치르게 됐다.
인천시는 해양중심도시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해양수산부에 바다의 날 기념식 유치를 신청해 왔지만, 21회 대회는 전남 순천만 국가정원에, 22회 대회는 전북 군산시 새만금에 밀려 유치해 실패했다.
 인천시는 내년 5월 31일 인천항 내항 8부두에서 공식 기념식을 열고 행사를 전후해 바다그리기 대회, 바다 마라톤대회, 팔미도등대 음악회 등 해양 문화 축제를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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