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인천 개항… 문학산서 중구로 중심 이동(인천역사 하)
1883년 인천 개항… 문학산서 중구로 중심 이동(인천역사 하)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8.10.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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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일제 행정구역 개편… 인천 개항장 일대로 대폭 축소, 송도 등 매립으로 땅 계속 늘어나
2016년 인천 인구 300만 돌파 행사. 국내 3번째 도시로 성장했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한 후 인천의 중심지역이 인천도호부가 있던 문학산 일대에서 신포동과 북성동 등 인천항 입구로 옮겨진다. 개항장 일대는 일본인과 중국인은 물론 서양인들도 자리잡아 국제도시로 면모를 갖춰간다. 인천은 일제강점기 초 권역이 크게 축소되기도 했으나 도시 팽창으로 지역이 다시 확대되기 시작했으며 많은 매립으로 지금도 땅이 계속 넓어지고 있다.

◆개항 이후 급격한 도시화
개항이후 인천은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된다. 일본인과 중국인은 물론이고 무역으로 큰 돈을 벌려는 외국회사들도 속속 들어와 서양인들도 적지않게 눈에 띄게 된다. 항구가 보이는 응봉산(현 인천 자유공원) 일대에 외국인만이 생활할 수 있는 외국인 조계지가 들어서 계획도시가 만들어진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외국인 조계지에는 일본인이 크게 늘어난다. 1900년 당시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4000명이었으나 1910년에는 1만4000명으로 늘어난다. 사실상 인천시 거주 인구의 절반이 일본인이었다.

1899년 경인선 개통은 인천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인천과 서울이 하루 생활권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인천을 통한 외국인 출입객들이 인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어졌다. 호텔 등 숙박업과 음식업이 타격을 입었다. 경인선 철도는 인천과 부평의 중심지를 변화시켰다. 철도 이용객이 많아지면서 인천의 중심지역이 항구가 있는 개항장 일대에서 동인천역 일대로 도시가 확장됐다. 부평은 오랫동안 계양구 일대가 중심지였다. 계양구에 부평도호부가 부평초등학교에 있다. 경인선이 개통하면서 부평의 중심지가 지금의 부평역 일대가 옮겨졌다. 일제는 부평역 주변에 병기제조창 등 무기 생산공장을 짓는다. 철도로 쉽게 운반하기 위함이었다. 인천항도 변화됐다. 1911년 인갑문공사가 시작돼 1918년 1단계가 준공되고 1923년 대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한 시설이 완공된다. 인천은 크게 조선 후기까지 인천부와 부평부 강화부 교동부 옹진부로 나뉘었다. 서로 다른 생활권역이었다. 각종 여지도 기록에 따르면 인천은 토지가 메마르고 흉년이 잦아 사람들이 가난하며, 부평은 궁벽하고 황폐하며 지대가 낮고 땅이 습하다. 강화도는 토지가 비옥해 백성들이 많고 누에치고 길쌈하는 인가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영종도(과거 자연도) 삼목도 용유도 등은 소금생산지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인천에는 주안과 남동 군자 등에 전국적으로 큰 염전이 있었다. 1930년대에는 전국 소금의 절반(15만톤 정도)을 생산할 정도였다.

개항장이었던 인천 내항 일대.

◆인구 300만 돌파 ‘한국 3대 도시’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행정개편이 이뤄진다. 인천은 일인들이 거주하며 개항장 일대로 크게 축소된다. 개항장의 부내면과 다소면 일대만이 인천부로 남는다. 당시 면적은 불과 6.06㎢였다. 인천의 다른 지역과 부평부는 새로 생긴 부천군으로 편입된다. 일제는 조선인의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고 자신들이 통치하기 편하도록 멋대로 행정개편을 단행했다. 일제는 1936년 인천부를 확장한다. 부천군 다소면과 문학면 일대를 편입시켜 면적이 27.12㎢로 늘어난다. 1940년 부천군 서곶 부내 남동 문학면이 다시 편입돼 165.82㎢로 늘어난다. 일제강점기 인천부의 확장은 군수공업 기지를 확보하려 하기 위함이었다. 광복후 1949년 인천부는 인천시로 승격하며 경기도 관할이 된다. 1953년 작약도 일대 등 해안지역이 인천시로 편입된다. 당시 면적은 168.36㎢였다. 인천시는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돼 경기도와 별도로 분리된다. 1988년 남동구와 서구가 신설됐다. 1989년 인천직할시는 계양과 영종이 편입 확장돼 313.4㎢로 면적이 크게 늘어난다. 1995년 인천광역시가 돼 강화군과 옹진군이 편입돼 8구2군제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954.1㎢로 확연히 커졌다. 매립이 계속 이뤄져 2010년 인천시 면적은 1000㎢가 넘어섰다.
인천 인구는 1895년 9500여명에 불과했으나 광복을 앞둔 1943년에는 24만명이었다. 광복 후 산업화 도시화 정책으로 인천인구를 급격히 늘어난다. 마침내 지난 2016년 300만명을 돌파했다. 지금도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다.
◆개항초기 외국인들에게는 인천보다 제물포
제물포는 인천의 옛 이름이 아니다. 인천은 1413년(조선 태종13년)부터 불려진 고유명칭이다. 제물포는 인천의 조그만 포구였다. 인천도 부(府)라고는 하지만 큰 고을은 아니었다. 우리 나라는 전통적으로 고을의 중심지에 향교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향교가 있는 곳이 그 마을의 중심지이다. 인천도 향교가 있는 데 제물포에 있지않다. 그런데 왜 제물포가 외국인들에게 알려졌나. 이는 해양세력이 개화를 이끄는 주도력을 가졌고 인천도 개화와 함께 성장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해양 세력은 우리나라에 진출할 때 제물포구를 통해 들어왔다. 인천과 인천항을 구별한다면 인천항이 제물포다. 광복 후 미군정은 인천을 잠시 제물포시로 불렀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27일까지였다. 곧바로 인천으로 다시 환원했다.

◆미추홀→소성→경원군→인주→인천으로 지명 바뀌어
인천이란 지명은 조선 태종때인 1413년 만들어졌다. 인천 이전의 지명인 인주(仁州)였다. ‘어진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곳 인주 이씨 집안에서 고려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를 비롯해 모두 7대에 걸쳐 12명의 왕비가 나왔기 때문에 조정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인주라고 불리기 전에는 ‘경원군(慶源郡)’이라 불렸다. ‘경사의 근원’이란 뜻이다. 이 역시 왕비들의 고향이기에 붙여졌다. 고려 중기 난을 일으킨 이자겸이 바로 인주 이씨였으며 당시 딸 세 명을 왕비로 보낼만큼 실세 외척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고려 이전의 지명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인주는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미추홀이라고도 함)현으로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소성(卲城)이라 고쳐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 9년에 수주(樹州) 임내(任內)에 소속하였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황비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이므로 올려 경원군으로 삼았다. 인종때 황비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지주사(知州事)로 삼았으며 공양왕 2년에 올려 경원부(慶源府)로 삼았다’
이같은 기록을 볼 때 인천의 지명은 미추홀(매소홀)→소성→경원군→인주→경원부→인주→ 인천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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