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화성행차 8일’, 소통 효심 나라사랑을 보여주다
정조 ‘화성행차 8일’, 소통 효심 나라사랑을 보여주다
  • 이두 기자
  • 승인 2017.08.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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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2월 9일~16일 수원화성 능행차 ...9월 23일과 24일 재현

 

정조대왕의 화성 능행차는 민심을 알아보고 국방력을 확인하고 어머니에 효도하는 대규모 이벤트였다. 화성 능행차 재현 장면.

 1795년 벌어진 정조의 능행채 재현 행사가 9월 23일부터 24일까지 서울과 수원, 화성 등지에서 펼쳐진다.
 조선 22대왕 정조는 1795년 윤2월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화성을 방문한다. 정조의 그 유명한 ‘8일간의 화성행차’이다.
 1795년 윤2월 9일 새벽 5시~7시(묘시)에 정조대왕의 능행차 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떠난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비롯해 두 누이와 6000여명의 신하와 군사들이 뒤를 따른다. 군복을 입은 정조는 숭례문을 지나 용산을 거쳐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당도한다. 원효로를 지날 때 쯤 정조는 “백성들이 협로에서 구경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하셨다. 노량주교(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중간지역)를 이용해 한강을 건넌다.
 노량행궁 용양봉저정(지금의 동작구 본동 30번지) 주정소에 도착했다. 정조는 신하들이 음식을 가져오자 직접 음식을 살펴보고 혜경궁께 올린다. 오전11시 30분경 정조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혜경궁의 어가와 함께 출발한다.
 용양봉저정을 떠나 장승백이 고개를 지나 상도동 대방동을 거쳐 시흥대로에 들어선다. 정조는 시흥대로 초입에서 행차를 잠시 멈추게 하고 혜경궁 가마 주변에 청포장을 치라고 명령한 다음 미음을 직접 들고 가서 어머니에게 올린다. 행차는 시흥행궁에 도착한다.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정조는 쉴 때마다 어머니에게 미움을 올리며 문안인사를 잊지 않는다. 다음날 오전 6시 45분경 시흥을 떠난다. 시흥현을 출발한 행렬은 대박산(지금의 석수전철역 부근)을 지나 염불교 (지금의 안양유원지 입구)를 거처 만안교를 건넌다. 안양전철역 부근에 이르자 정조는 혜경궁의 어가를 받들어 행차를 쉬게 한다. 잠시 후 출발해 다시 의왕 사근참행궁에 도착한다. 지금의 의왕시 고촌동이다. 사근참행궁을 출발한 행렬은 미륵현(지지대 고개, 지금의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지점)에 당도한다.
 행렬은 수원의 노송지대 입구 앞길을 거쳐 만석거에 다다른다. 영의정 채제공이 어가를 맞이한다. 또한 장용영 군사들이 길에 늘어서서 행렬을 갖춘다. 마침내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격인 장안문에 도착한다.
 정조가 갑옷과 투구를 입고 장안문 안으로 들어가니, 화성유수를 비롯한 여러 신하가 정조를 맞이한다. 장안문을 거쳐 남문인 팔달문을 향해서 가다가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를 지나 화성 행궁의 봉수당에 이르러 말에서 내린다. 혜경궁 홍씨는 휴식처인 장락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든다.

 행차 삼일째인 11일 정조는 화성향교의 대성전을 참배하고 행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행궁의 우화관과 낙남헌에서 문과 무과 특별과거시험을 실시한다. 수원을 비롯해 광주와 시흥 등 지역 선비와 무사들에게 기회를 줘 지역 주민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오후에 회갑연을 베풀기 위한 예행연습이 진행됐다.
 서울을 떠난지 4일째인 12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묘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한다. 슬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건강이 걱정됐다. 신하들의 위로를 받으며 돌아나온다. 정조는 현륭원을 관리하는 관원들에게 벼슬을 올려 주기도 하고, 포목 혹은 쌀을 상으로 준다. 또한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 승려들에게도 상을 내린다. 그날 오후와 야간에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한다. 참여한 군사는 모두 3700여 명이다.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와, '화성성역의궤-연거도’ 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등불을 밝힌 모습이다.
 5일째인 13일 오전 혜경궁홍씨의 환갑 잔치인 ‘진찬례’가 화성행궁의 정궁인 봉수당 앞마당에서 벌어진다. 회갑잔치에 초청된 분들은 혜경궁 홍씨의 두 딸(청연군주와 청선군주)과 친척 등 예순 아홉 명이다. 회갑연에서 정조는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읊고, 혜경궁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정조는 신풍루 앞에서 백성들을 만나 쌀과 소금을 나누어 주고 죽을 퍼주기도 한다. 화성에 사는 백성 4813명이 혜택을 받았다. 사미행사가 끝난 후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낙남헌에서 노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양로연이 거행된다. 양로연에 초대 받은 노인은 노인 관료 15명과 화성에 사는 노인 384명이다. 음식과 연례가 행해졌고, 노인들에게는 비단과 청려장이 상으로 주어진다. 오전11시 ~ 오후1시에 정조는 직접 군복을 입고 측근 몇 명과 함께 화성 성곽을 살펴보고 득중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 시범에 나선다.
 7일째인 15일 귀경길에 오른다. 오전 8시 45분경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출발한다. 장안문 밖에서 문무과 별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꽃모자를 쓴 무동들을 데리고 줄을 서서 맞이한다.
 정조는 수원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마다 미륵현 고개 위에 이르러서 능원을 오래도록 보고 슬픔을 달랬다고 한다. 사근평행궁에서 점심을 한 후 시흥행궁으로 출발한다. 시흥행궁에서 역시 하루를 보낸다. 8일째인 16일 저녁 정조는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창덕궁으로 돌아온다.
 이 내용은 8일 간의 화성행차(1795년 윤 2월 9일 ~ 16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은 물론, 행차에 들어간 비용과 물품, 재료, 비용 등 하루의 일과를 자세히 적고 있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요약한 것이다.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화성은 최초 신도시이자 첨단 과학의 결정체
 화성(華城)은 1794년 1월 축성을 시작해 1796년 9월 완공된다. 1792년 정조는 정약용에게 화성 계획을 설명하면서 화성 건설에 대한 설계를 할 것을 명한다. 화성은 정약용의 기본설계서인 ‘성설’에 기초해 수원 중심부에 자리한 143m의 팔달산 동쪽에 자리잡았다. 화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친환경적인 성곽이기도 하다. 화성 축조에는 거중기와 유형기, 수레 같은 새로운 과학기계가 이용된다. 설계 당시만 해도 10년이 걸릴 것같았던 공사기간이 34개월로 단축된 것은 새로운 기계와 건축 공법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인부들에게는 성과급을 줘 사기를 드높였다. 추운 겨울에 공사를 하는 인부를 위해 정조는 털모자와 솜옷을 하사했다. 이 또한 인부들이 진심으로 일을 하게한 원동력이 됐다. 화성은 검은 벽돌로 쌓았다. 그래서 일반 벽돌보다 촘촘하고 견고하다.

화성능행도.

◆수원 13차례 방문, 슬 좋아해 한번 마시면 폭음
 정조는 재위기간 24년(1776년~1800년) 중 66차례나 궁궐밖으로 나갔다. 1년회 2.7회꼴이다. 그는 백성들의 소리에 그만큼 귀를 기울인 것이고 그래서 조선 최고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정조는 수원을 13차례 방문했다.
 1795년(을묘년)의 8일간 능행차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해 어머니인 혜경궁홍씨가 회갑연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참배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화성 축성의 명분과 점검, 친위대인 장용영 군사들의 군사력을 재정비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있었다..
 정조는 술을 좋아했다. 평소에는 술 때문에 실수할까 걱정했지만 일단 마시면 많은 양을 마셨고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함께 마시던 신하가 취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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