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선언' 초미의 관심...정전협정은 어떻게 맺어졌나(53년)
'종전 선언' 초미의 관심...정전협정은 어떻게 맺어졌나(53년)
  • 이두 기자
  • 승인 2018.08.2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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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투하면서 2년간 협상… 조인식 불과 12분, 포로교환 문제로 협상 ‘질질’
판문점 정전협정 장소. 처음엔 천막이었다 협정 체결때는 목조건물이 들어섰다.

올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종전 선언’이 국제 사회에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한국전쟁 후 양측 당사자들은 전쟁을 잠시 멈춘다는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전쟁을 끝낸다는 종전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지금도 한반도는 전쟁이 끝난 상태가 아니다. 과연 65년전인 1953년 정전협정은 어떻게 맺어졌을까.

◆2년간 줄다리기 협상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조인식이 열렸다. 유엔군(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펑더화이) 간의 정전 협정이 맺어졌다. 한국은 정전협정 당사자에서 빠졌다. 양측의 냉랭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조인식은 불과 12분만에 끝났다. 조인식 후 양측은 악수도 하지 않고 헤어질 정도로 분위기가 삭막했다. 정전 협정의 발효 시점은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였다. 정전협정문의 공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및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이다.
한국전쟁의 휴전 논의는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50년 12월 유엔에서 처음 이뤄졌다. 캐나다와 인도, 이란 세 나라는 휴전을 위해 중국과 접촉을 시도한다. 유엔은 휴전결의안을 채택하고 1951년 1월 중국과 접촉하나 중국은 휴전 제안을 거절한다.
1951년 3월부터 중부전선 일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국지전이 벌어질 뿐 전선이 고착화 된다. 1951년 6월 미국 주도로 휴전협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51년 6월 개성에서 처음 정전 협상이 이뤄진다. 휴전선 확정과 포로 교환 문제가 주된 의제였다. 군사분계선 확정 및 휴전 감시 기구 설립, 외국군 철수 등에 대해 합의가 이뤄진다. 그러나 포로 교환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해 1년여간 시간을 보낸다. 이후 1953년 7월 27일까지 2년여간 지루하고도 고단한 협정이 진행된다. 양측은 2년간 무려 765회나 접촉했다. 협상 기간 중에도 남북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치라도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발효되는 시점에 양측 군인들이 점령한 땅이 곧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었다.

1952년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한국 휴전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반드시 휴전 협정을 성공시키라고 주문했다.
◆올해 ‘종전 선언’ 초미의 관심
한국전쟁에 대한 종전선언이 올해 이뤄질지 국내는 물론 외국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외국의 유명 언론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통화했으며 남한과 북한의 종전 협의를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이 잘 풀리고 종전협정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정말로 종전선언이 이뤄진다면, 6.25 전쟁도 68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은 판문점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논의하면서 4자회담과 6.25 전쟁 당사국 간 논의를 통해 올해 내로 종전협정을 체결하고 종전을 선언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6월 12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만나면서 종전 선언에 대한 기대치는 한껏 높아졌다.한반도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도 종전 선언을 비롯한 한반도의 급변 정세를 놓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정전협정의 당사국이었던 중국은 종전선언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영향력 내세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제로 북한의 김정은은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의 과정을 중국과 협의하며 대처하고 있다.
 중국의 언론들은 '중국이 없는 종전협정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며 한반도에 대해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하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에게 '정치적인 선언인 종전선언은 셋이서 하지만 평화협정은 전쟁 당사국인 중국이 반드시 참가할 것이니 불편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종전선언을 두고 미국과 북한은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일부에서는 우여곡절이야 있겠지만 올해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종전선언은 북한 비핵화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북한 비핵화 문제가 풀려야만 종전 선언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종전선언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의 확실한 비핵화 스케줄이 나와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북정상은 9월에 다시 평양에서 만나기로 했다. 정상회담 당시만 해도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와 종전 선언을 놓고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한국의 중재 역할이 다시 커져만 가고 있는 상황이다. 남북은 이미 9월에 평양에서 3차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 강력반대
한국전쟁 당시 우리 나라는 정전협정에 강력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무력으로라도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해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 군인들에게 전투 행위를 계속할 것을 주문했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이승만은 줄기차게 정전 협정이 휴지 조각이라며 부정했다. 정전 이후인 1954년 7월 31일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정전 협정은 이제 공문서(空文書)가 되었다" 며 정전 자체를 부정했다. 그만큼 통일 의지가 강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통일을 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자 여러 차례 미국가 맞선다. 연합군의 포로를 임의로 석방하여 포로교환 협상 등을 방해한 반공포로 석방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한미상호방위 조약을 비롯해 한국군 증강, 한국 원조 등을 미국으로부터 이끌어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날의 굳건한 한미 관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이라 할 수 있다.

판문점서 열린 한국 정전 65주년 행사.

◆지난달 27일 판문점서 정전 65주년 행사 열려
유엔사에서 주관하는 ‘한국전쟁 정전 65주년’ 행사가 지난 달 27일 파주 판문점에서 개최됐다. 정전협정은 지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 사이 체결됐다. 정부는 이 날을 '6·25전쟁 유엔군 참전의 날'로, 북한은 '조국해방전쟁 승리의 날'로 기념해왔다.
남북 평화 분위기 속에 개최되는 이번 행사는 더욱 의미가 있다. 북한이 최근 조속한 종전선언 채택을 촉구하고 있는 만큼 정전협정 기념일에도 대결보다는 종전선언의 필요성과 평화를 향한 의지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종전선언이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평화협정은 아니나 ‘한반도에서 전쟁은 끝났다’는 선언으로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4·27 판문점 선언) 열망에 불을 지필 것으로 기대된다.이번 행사에 특별히 초청받은 최종환 파주시장은 “이번 행사가 종전선언으로 이어지는 첫발이 되길 바란다”라며 “한반도 평화 정착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더욱 발전시키고 파주가 평화도시로서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 할 수 있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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