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가까운 곳이라해서 주(州) 대신 천(川)으로 변경
서울 부산에 이어 인천 지명 유래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인구 300만 명의 인천은 서울과 부산의 뒤를 잇는 우리나라 3대 도시이다. 인천(仁川)’이라는 이름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진<仁> 내<川>’이다.
냇물이 어질다?’. 이는 도대체 어떻게 나온 말이며, 실제로는 무슨 뜻일까.
인천(仁川)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임금 13년(서기 1413년), 조정(朝廷)이 전국의 행정구역 이름을 새로 정할 때 처음 생겼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 10월15일자 기사를 보면 이와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각도 각 고을의 이름을 고쳤다. 임금이 하륜(河崙)에게 이르기를, ‘전주(全州)를 이제 완산부(完山府)라고 고치고서도 오히려 전라도라고 칭하고, 경주(慶州)를 이제 계림부(鷄林府)라고 고치고서도 오히려 경상도라고 칭하니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하륜이 말하기를 ‘유독 이곳만이 아니라 동북면(東北面)·서북면(西北面)도 이름을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옳도다’ 하였다. 드디어 완산을 다시 전주라 칭하고, 계림을 다시 경주라 칭하고, 서북면을 평안도로 하고,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로 하였으니, 평양(平壤)·안주(安州)·영흥(永興)·길주(吉州)가 계수관(界首官)이기 때문이다. 또 각 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무릇 군현(郡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천(川)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
인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이 글의 뒷부분 “무릇 군현(郡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천(川)자로 고쳤다”는 말과 관계된다. 그 직전까지는 인천이 ‘인주(仁州)’라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방침으로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처럼 ‘인주(仁州)’는 ‘인천(仁川)’으로 고침으로써 ‘인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이다. 당시 ‘주(州)’자가 들어간 고을 이름을 고칠 때 그 땅이 물에서 가까운 곳에는 ‘천(川)’자를, 산이 많은 곳에는 ‘산(山)’자를 붙이는 식으로 바꾼 경우가 많다. 인주는 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물에서 가까운 곳이라 ‘인천’이 됐다.
인천시는 이렇게 ‘인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10월15일을 ‘시민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시민의 날’을 정할 때 태종실록의 음력 날짜와 지금 우리가 쓰는 양력 날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됐지만 논란 끝에 이날로 결정됐다.) 결국 인천은 ‘인주(仁州)’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앞서 나온 ‘영주(寧州)’나 금주(衿州)‘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주(仁州)의 ‘주(州)’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을’을 말하는 것일 뿐 달리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천의 뜻을 풀기 위해 필요한 일은 ‘인(仁)’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다.
오늘날 ‘仁’은 ‘어질 인’으로 뜻과 소리를 단다. 이 때문에 통상적으로 인천은 ‘어진 고을’이라 풀이된다. 그리고 이는 고려시대 문종에서 인종 임금까지 7대에 걸쳐 이곳에 살던 인주 이씨(李氏) 집안이 임금의 외가이거나 왕비의 친정, 곧 ‘7대 어향(七代 御鄕)’이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