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수원화성 능행차때 행궁 3곳서 머물러
정조 수원화성 능행차때 행궁 3곳서 머물러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7.09.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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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일 정조능행차 재현...시흥 사근참 화성 행궁서 백성 소리 듣고 군사훈련 등

 

수원화성행궁. 조선 최대의 행궁으로 사실상 궁궐 축소판이다.

9월 23일~24일 조선 22대왕 정조대왕의 능행차행렬 재현이 서울과 시흥·수원·화성 일대에서 이뤄진다. 정조가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실제로 했던 수원화성 능행차를 1박 2일로 축약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행차’를 하면서 시흥행궁, 사근참행궁 등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정궁(正宮)을 떠나 밖으로 나와 머무는 곳을 한다. 정조는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길인 과천, 안양, 사근참, 시흥, 안산, 수원화성에 행궁을 만들었다. 이번 능행차의 주요 무대가 되는 화성, 시흥, 사근참 행궁을 알아본다

 수원화성 행궁은 가장 대표적인 행궁이다. 조선 최대 행궁이자 행궁 문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행궁이 100~150칸 정도 규모인데 화성행궁은 무려 576칸에 이른다.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조선시대 행궁 중 가장 크다. 정조는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으로 내려와 살려했기에 실제 살았다면 규모는 더 커졌을 지도 모른다.
 화성 행궁은 1794년부터 1796년(정조 18~20년)까지 화성이 축성될 당시 함께 건축됐다. 1789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고 사적 제478호다.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됐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에 의해 몇몇 건물만 남기고 모두 파괴됐다. 일부 자리에는 병원과 경찰서 등이 들어섰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행궁 복원공사를 시작, 주요건물 482칸을 복원하면서 2003년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화성행궁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화성에서 가장 높은 팔달산으로 올라가 아래의 전망을 살피는 것이 좋다. 팔달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서장대에 서면 화성이 한눈에 보인다. 이른바 화성의 4대문(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이 모두 눈안에 들어온다.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초기에는 '진남루'로 불렸는데 일본의 재침입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앞두고 신풍루로 명칭을 고쳤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임금의 행차 때에는 정전으로 쓰였다. 처음에는 정조가 장남헌이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달았는데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바꿨다.

봉수당은 글자 그대로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의미다. 아들인 정조의 효심이 통했는지 혜경궁홍씨는 81살까지 장수했다. 전문가들은 봉수당을 효 문화유산의 대표 건축물로 꼽는다. 봉수당은 구한말 개화 물결과 일제강점기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됐다 1997년 12월 복원됐다.
 봉수당에 붙어 있는 건물이 바로 장락당이다. 1794년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대비해서 지은 것이다. 명칭은 중국 한 나라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따왔다. 한나라의 장락궁은 원래 황제가 신하를 조회하는 곳이었으나 뒤에 태후가 거처하게 되면서 대왕대비나 대비전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혜경궁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서 장락당이라 이름 짓고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 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누문이다. 태평성세와 함께 왕권강화를 구가했던 당 태종의 궁궐이름에서 따왔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한다.
 ◆행궁이란 왕이 민심 알아보고 전쟁 피할 때 궁궐을 나가 머물던 곳
서울의 경복궁이나 창덕궁은 평소에 왕이 머물면서 나라를 다스렸던 정궁이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민심을 알아보거나 전쟁의 위험을 피하거나 국가적 행사를 할 때 밖으로 나가 머무는 곳이다. 행궁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정도로 기원이 오래됐다. 역대 왕들은 서울의 본궁 이외에 전국에 행궁을 세우고 지방을 다닐 때 묵거나 전쟁 발생시 피난처로 사용했다. 고려 때 지리도참사상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행궁이 세워졌다. 지금 남아 있는 행궁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이다.
 조선 행궁의 대표적인 것은 수원화성, 남한산성, 북한산성, 강화, 온양, 전주 행궁 등이다. 수원화성은 신도시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남한산성·북한산성·강화 행궁은 전쟁 때 대피목적, 온양은 온천지역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주행궁은 조선 초기부터 왕의 행차가 있던 곳이다. 전주 경기전에 모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유사시에 옮기기 위해 산성 내에 행궁을 둔 것이다.

정조가 백성과 소통하는 시흥행궁 격쟁.

◆시흥행궁, 백성의 소리 듣고 풀어주는 격쟁 이뤄져
시흥행궁은 정조가 창덕궁과 수원화성을 오갈 때 이틀을 묵었던 곳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서울 금천구 시흥 5동 831번지 6호 부근으로 추정된다. 자료에 따르면 정조는 1795년 윤2월 9일, 2월 15일, 1797년 1월 29일, 같은 해 8월 19일에 머물렀다. 행궁은 없어지고 그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수령 830년 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1794년(정조 19)에는 안양 만안교를 돌다리로 개축하고, 경기감사 서용보가 왕의 능행을 위하여 시흥에 행궁을 설치하였다. 행궁의 규모는 114간이나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금천현은 시흥현으로 개칭되었다.
 시흥행궁은 그림으로 남아있다. 정조의 화성능행도는 모두 8폭의 그림 병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한편이 ‘시흥환어행렬도’이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와 장헌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시흥행궁에 다다른 모습이다.
 올해 능행차 재현때 시흥행궁에서는 호위무사가 도열해 능행차 행렬을 맞는 퍼포먼스를 한다. 백성들이 직접 임금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의견을 내는 '격쟁'도 재현한다.
 

사근행궁 나들이. 지금의 의왕시.

◆사근행궁, 일제때 면사무소로 사용되다 철거
 사근행궁은 현재 의왕시 고천동주민센터 주변이다. 지금은 사근행궁이 있던 자리임을 나타내는 기념비가 있다. 정조 이전인 1760년 사도세자가 온양으로 행차할 때도 지나간 곳으로 정조는 사도세자가 잠시 쉬어간 곳을 기념하여 ‘사근참행궁’으로 이름짓고 마중 나온 노인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고 한다. 행궁이 들어서기 전부터 도성에서 삼남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사근행궁 터에는 정조의 효행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서 세운 기념비만 서 있고 관련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남한지>에 의하면 행궁은 본채인 정당과 별채인 별궁으로 구성되었으며, 본채 좌우에 창고가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 강제합병 한 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을 통합하며 ‘의왕면’이라 칭하면서 ‘의왕’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사근행궁은 일제강점기 의왕면사무소로 사용되다 1937년 매각되면서 철거되었다. 사근행궁터는 1919년 3월31일 밤 의왕지역 800여 주민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북한산성 행궁은 전쟁 대피용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의 치욕과 이어진다. 북방민족인 후금(뒤에 청으로 이름 바꿈)과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인식하에 남한산성 보강과 함께 행궁건설도 이뤄져 1626년(인조 4년) 완공됐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7일간 머무르면서 전쟁을 지휘했었다. 원래 227칸으로 이뤄져 있었으나 이후 파괴되고 다른 일반건물들이 들어선 것을 최근 복원공사를 통해 지난 2012년말 일반에 공개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면 서북쪽 산기슭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유사시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걸맞게 다른 행궁과 달리 서울도성의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展)과 우실(右室)을 갖추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산성에 대비되는 곳이 북한산성인 것을 감안하면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하는 북한산성 내에도 국왕이 머물기 위한 행궁이 있다. 다만 지금은 행궁터만 남아 있고 겨우 발굴을 시작한 단계다.
 북한산성 행궁은 1712년(숙종 38년) 북한산성 축성과 함께 세워졌다. 당시 총규모가 115칸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는 데 1915년 수해로 파괴된 후 그대로 방치됐다. 북한산 속 깊은 곳에 위치하는 관계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터가 원형대로 존재해 향후 행궁 복원전망이 밝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북한산성 넓이는 49만4516㎡(약 15만 평)로 한양 도성 전체 넓이 46만7922.6㎡(약 14만1550평)보다 오히려 넓다. 이 안에 행궁을 지은 건 완공 다음 해인 1712년. 유사시 도성이 함락되면 왕이 비상집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넓이 1만1388㎡(약 3450평)에 외전 및 내전 124칸 규모로 지었다. 북한산성은 도성에서 멀지 않고 강화나 남한산성처럼 강을 건너 이동할 번거로움도 없으니 행궁을 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20세기 초까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던 행궁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1915년 북한산 대홍수 당시 유실됐고, 일제강점기 때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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