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우하우스 철거로 본 인천 집창촌의 어제와 오늘
옐로우하우스 철거로 본 인천 집창촌의 어제와 오늘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7.09.29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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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 ‘끽동’ 사라지고 옐로우하우스도 곧…

 

조만간 철거될 인천 엘로우하우스. 1960년대 초 생겨났다.

인천내 유일한 집창촌(성매매 집결지)인 옐로우하우스가 마침내 사라진다. 오랫동안 끌어왔던 도시 재개발 사업의 합의가 이뤄져 내년 상반기 중 철거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지역주택조합 요건을 갖추어 철거되는 자리엔 지상 40층 규모(754채)의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오래전부터 옐로우하우스 주변에는 아파트촌이 들어서고 다시 개통된 수인선 전철역 숭의역 출입구가 옐로우하우스 입구를 마주 보는 형국이 돼 개발 압력을 받아왔다. 현재 옐로우하우스에는 10여개 없소에 50여명 정도가 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옐로우하우스는 1960년대부터 숭의동 360번지 일대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지난 60년간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성매매 집결지인 집창촌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사회정화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윤락가 정비에 나선다. 이에따라 일정강점기 때부터 중구 신흥동(옛 선화동)에 있던 윤락가가 철퇴를 맞는다. 신흥동은 일제강점기때부터 형성된 유곽 지역으로 대표적인 사창가였다. 신흥동 외지였던 남구 숭의1동 지금의 옐로우하우스 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업주들은 숭의1동으로 옮긴 뒤 건물을 짓고 미군부대에서 페인트를 얻어 벽을 색칠했다. 페인트 색이 노랗다보니 집창촌 전체가 노랗게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숭의동과 용현동 학익동 일대는 미군부대가 많았다. 1970년대초까지 인천항에는 미군 항만사령부가 있어 도크 시설을 관리했다. 미군 병사들의 입을 통해 ‘옐로우하우스’라는 별칭이 생겨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90년때까지 옐로우하우스는 호황이었다. 특히 인천항과 가까워 선원들이 많이 찾았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많이 몰려오자 이 곳 아가씨들이 한복차림으로 서비스에 나섰고 일본인 현지처 노릇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인천에 옐로우하우스 못지않게 유명한 집창촌이 한 곳 더 있었다. 인하대 인근의 학익동(일명‘끽동’) 사창가였다. 1960년대부터 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 414번지 일대에는 성매매 업소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 곳도 6·25 전쟁 시기 인근에 외국 군인이 주둔하면서 집창촌이 형성되었고, 외국 군인들의 철수 이후에도 업소들이 남아 1960년대 이후 내국인을 상대로 성매매 영업을 했다.
 학익동 집창촌은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호황이었다. 옐로우하우스와 달리 국내 젊은이들이 많이 찾았다. 한창때는 업소만도 50곳이 넘었으며 종사 여성은 300여 명에 달하였다. 2000년대 들어 학익동 일대가 개발되고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시행으로 학익동 집창촌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또 인천 구월동과 간석동 일대가 개발돼 유흥업소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이 곳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2004년 3월 인천광역시 남구 의회에서 ‘학익동 특정 지역 폐쇄안’이 통과되고, 같은 해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학익동 집창촌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2005년부터 학익동 집창촌 업소 건물에 대한 철거가 시작되어 시유지에 위치했던 업소가 철거되었지만, 사유지에 위치했던 일부 업소는 인천광역시의 집창촌 폐쇄와 도시 개발 방침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학익동 집창촌 지역은 완전히 철거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새롭게 도시 개발이 이루어져 5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과 공원, 도로 등이 조성돼 있다. 인천에 공식적인 성매매 집결지는 없다. 그러나 어디에서 이뤄지고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신흥동에 유곽 만들어
 인천지역 성매매 집결지 역사는 개항과 함께 시작됐다. 개항 후 많은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자 자연적으로 몸을 파는 여자들도 생겨나게 됐고 상당수는 일본에서 건너왔다. 본격적인 집창촌은 1902년 지금의 신흥시장 인근에 생긴 부도유곽(敷島遊廓)이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주거지 영역을 확대하면서 신흥동까지 넘어오게 된다. 당시 17개 일본인 요릿집 주인들이 공동으로 돈을 내 지금 신흥시장 입구에 부도루를 열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고 성매매가 이뤄지는 유곽이었다. 부도유곽 안에는 일본인 창기 106명, 조선인 창기 32명이 소속돼 있었다고 한다.

1924년 동아일보 기사는 부도유곽의 호황을 보도하고 있다. 난봉꾼들이 뿌린 돈이 조선인 900여명에 3000원이고 일본인 1000여명에 1만6000원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쌀 한말값이 4원50전인 시절이었다. 광복후 신흥시장 일대가 번화가가 되면서 부도유곽은 사라지고 숭의동과 학익동에 집창촌이 만들어진다.

1902년 7월24일 부산에서 시작된 유곽은 같은 해 1902년 12월 인천, 1903년 원산, 1904년 서울 순으로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유곽의 설치는 일본 거류민들 사이에서 성병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 주둔군이 안전하게 성을 매수하게 하려는 목적과 관련된 것이었다. 게다가 도로를 개설하고 수도를 설치하는 등의 비용을 세금을 통해 확보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성병 관리와 세금 징수를 위해 유곽을 특정 공간에 설치해 관리하였던 것이다. 개항후 옛 선화동(지금의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전국 3대 공창 지역으로 이름을 알렸다.

인천 경동 골목 계단에 '용동권번'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경동에 권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생학교 용동권번, 인천의 자존심을 지키다
 일제강점기 동인천역 앞 애관극장 뒤편에는 전국 최대의 기생사관학교인 ‘용동권번’이 있었다. 권번(券番)은 일종의 기생조합이자 교육기관이다. 인물과 태도, 노래와 춤 등의 심사를 거쳐 여자 아이들을 모집해 기생으로 양성하는 일도 했다.
 용동권번은 1901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다.
 기생은 지금의 술을 함께 마시고 몸을 파는 단순한 창녀와는 급이 달랐다. 이들은 풍류를 알았고 현실 감각이 있었다. 인천 기생 9명은 조선말 나라가 어려울 때 기꺼이 독립협회에 기금을 내놓았다. 1925년에는 지역에 비가 엄청와 이재민이 발생하자 먹을 것을 가지고 이재민 돕기에 직접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
 인천 용동권번에서 잊지못할 인물이 한 명 있다. 50대 이후라면 영화배우 복혜숙(1904~1982)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연극 배우였던 그녀는 극단 토월회에서 활동하며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연극이 흥행에 실패하자 극단과 극단 관계자들은 모두 서울로 떠났다. 그녀는 인천에 남게 된다. 용동권번에서 3년간 생활하며 기생의 권리보호에 앞장섰다. 춘원 이광수와 인촌 김성수 등 사회 저명인사가 복혜숙과 인연이 있어 인천을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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