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 개항 전까지 쇄국정책, 유일 창구는 남겨뒀다(시리즈19)
일본도 개항 전까지 쇄국정책, 유일 창구는 남겨뒀다(시리즈19)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8.01.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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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 건설… 네덜란드 상인들 머물러,서양과 외국 움직임 등 보고받아, 미국 군함 온다는 소식도 미리 알아

 

임진왜란 후 일본도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펼쳤다. 단 한곳만 예외였다.

일본과 처음 통상을 한 서양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일본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조선과도 떼어놓을 수 없다. 1543년 명나라로 가던 포르투갈 화물선이 일본 규슈 남쪽에 불시 상륙한다. 서양인들과 첫 만남이었다. 일본인들은 포르투갈인이 갖고 있던 물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멀리 떨어진 곳의 표적을 놓고 불을 발사하면 명중하는 철포鐵砲(철포. 일본식 뎃포)였다. 일본 영주는 큰 돈을 주고 2정을 산 뒤 곧바로 제조에 들어간다. 1년후 수십정의 뎃포가 만들어졌다. 소문이 나기 시작해 뎃포가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16세기 일본은 전국 시대였다. 너도 나도 막부 1인자가 되기 위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뎃포에 가장 관심을 보인 인물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각 영주들이 패권을 잡으려고 이합집산을 했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유력한 맹주들이었다. 조총술을 배운 오다 노부나가는 뎃포대를 앞세운 군사력으로 다른 다이묘들을 누르며 승승장구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 전설적인 다케다군의 기마대를 뎃포로 무장한 군대로 물리쳐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살해당해 꿈을 이루지 못한다. 뒤이어 등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이 뎃포대를 활용해 조선을 유린했다. 조선군은 뎃포라는 총을 보고 조총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도 조선, 중국과 마찬가지로 외국에 대해 폐쇄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단 한곳만 예외로 했다. 임진왜란 후에도 포르투갈 상인들은 무역을 하면서 기독교를 포교하려 했다. 앞서 1549년 포르투갈 선교사인 자비에르가 일본에 와 가톨릭을 전파한다. 일본은 기독교 금지령을 여러 차례 발동했다. 그러나 나가사키를 근거지로 한 포르투갈인들은 통행에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으면서 선교에 적극 나섰다. 일본은 기독교 전파를 경계해 일본과 격리시키도록 인공섬을 만들기로 한다.
 1636년 나가사키에 인공섬인 데지마가 조성된다. 이 곳은 일본 관리가 발행하는 통행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한 지역이다. 약1만4800평으로 축구장 3개 정도의 크기이다. 이 곳에 외국인들이 생활하게 했으며 이들이 일본 땅에 발을 디딜때는 반드시 허가를 받도록 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데지마에 갇히게 됐다. 1637년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돼 난(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키자 포르투갈 상인들이 추방된다. 이 데지마를 네덜란드 상인들이 차지하게 된다.
 1600년 일본을 처음 찾은 네덜란드인들은 1609년 히라토에 상관을 세우며 일본과 교역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포르투갈인들과 달리 에도 막부에게 무역과 종교의 분리를 약속한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 기회를 틈타 막부롤 도와주고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641년 네덜란드 상관이 이곳으로 이사와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인들은 장사에 치밀하지 못하고 자부심이 강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데지마는 남자들만 체류가 가능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운영하는 오란단상관이 있었다. 오란다상관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무역을 위해 일본에 설치한 영업소를 말한다. 통상 10여명정도가 있었다. 오란다상관이 운영하는 배는 매년 봄 데지마에 입항해 10월~11월에 출항했다. 네덜란드 상인은 주로 생사와 옷감 염료 후추 등 가지고 왔고 일본에서는 구리와 자기, 칠기, 간장, 병풍 등을 유럽으로 가지고 갔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1859년까지 200여년동안 데지마에 머물면서 100회 넘게 에도 쇼군을 찾아가 서양의 정세를 보고했다. 상인들은 에도에 가서도 일정 지역에 머물러야 했다. 이들은 서양해부학이나 식물학 등 다양한 서양 지식을 전했다.
 18세기 중반들어 일본인들이 서양학이라고 여겼던 난학이 빠르게 전파된다. 서양학문의 필요성을 느낀 막부도 양서의 수입을 허락한다. 오란다상관에만 머무르던 의사들이 데지마 밖으로 나와 일본인들을 치료하기 시작했고 의학을 알려준다. 일본 역사에 적지않은 발자취를 남긴 식물학자이자 의사인 스웨덴인 툰베리는 해부책자를 일본에 전했다. 독일인 지볼트와 캠페르도 서양 학문을 일본인들에게 가르쳤다. 18세기 후반 서구 열강은 물론 러시아가 급속히 북해도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위협하자 일본은 해방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봇물이 터진 서양 학문의 유입은 막을 수 없었다.
 이후 네덜란드 상인들은 1859년까지 200년 넘게 일본과 무역을 독점하면서 유일한 해외무역 창구 역할을 한다. 오랫동안 네덜란드와 일본은 ‘윈윈’한다. 일본산 은이 네덜란드 배에 실려 중국과 간접 교역 결제 수단으로 사용됐으며 일본에서 조선 도공 후예들이 만든 도자기 수만점이 팔려 나가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과 무역 외에 유럽과 세계의 소식을 알려줬다. 네덜란드 무역선들은 ‘풍설서’라는 국제보고서로 중국과 동인도의 유럽 함대, 정박중인 영국군함 등의 일본에 긴밀한 소식을 전한다. 이 곳은 1854년 일본이 개항할 때까지 유럽과 일본을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유럽과 일본을 연결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다.
 데지마를 통해 일본은 많은 것을 얻었다. 서구의 앞선 지식과 새로운 정보들을 구했다. 일본에서 난학과 양학이라 불리는 신학문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난학을 네덜란드 학문을 말한다. 일본은 1850년대까지 난학을 배우려는 풍토가 강했다. 그러나 미국과 개항 후 네덜란드보다 영국이 세계 지배 세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네덜란드어를 하루 아침에 버리고 영어로 방향을 전환한다.

일본 인공섬 데지마.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일본과 교류했다.

◆외국 정세를 알려주는 ‘오란다풍설서’
 나가사키에 영업점을 둔 네덜란드 선박은 매년 봄 나가사키 데지마에 입항했다. 데지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업점인 오란다상관은 선원들이 가져온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보고서를 일본에 제출했다. 이른바 ‘오란다풍설서’다. 풍설이란 소문, 풍문이란 뜻이다. 풍설서에는 일본에 귀중한 정보가 가득 담겨있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 정세는 물론이고 선박 항해로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일본 나가사키까지의 운항 과정, 그 밖의 새로운 내용 등으로 이뤄져있다.
 당초 풍설서는 일본에 서양 세력의 침투를 불허하고 서양 세력의 움직임을 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특히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종교 전파를 하려하자 이를 막기 위한 의도였다.그러나 당초 의도와 달리 풍설서는 세계로 눈을 뜨게 하는 순기능을 했다. 일본은 풍설서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유럽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산업혁명, 유럽을 뒤흔든 나폴레옹 전쟁, 중국의 서구 열강 침략이 도화선이 된 아편전쟁 등의 내용을 받아볼 수 있었다. 18세기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오란다상관원 대표는 매년 한 차례 에도로 가서 쇼군에게 지난 1년간의 유럽 상황과 외국 정세를 알려줬다. 1850년대 미국 군함이 일본에 온다는 사실도 일본은 이들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일본에게 이들이 알려주는 정보는 매우 유익했다.풍설서의 내용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풍설서에 담긴 내용에 서양의 평등 인권 사상이나 법과 사회 제도, 외교 정책 등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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