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군인 3500명 쿠데타(61시리즈5161)
1961년 5월 16일, 군인 3500명 쿠데타(61시리즈5161)
  • 최용희 기자
  • 승인 2021.0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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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저항받지 않고 곧바로 정권 장악
5.16 당시 박정희 장군. 옆이 차지철.
5.16 당시 박정희 장군. 옆이 차지철.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 서울 남산 KBS 방송국에서 박종세 아나운서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이같은 내용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군인 세력이 들고 있어났음이 전국에 공표되는 순간이었다.

 5월 16일 새벽 박정희와 군인 3500명은 한강을 넘어 정부의 주요기관을 장악한다. 영등포와 김포, 의정부에 있던 해병대와 공수특전단, 6군단 포병대 군인들은 작전에 맞춰 서울로 향한다. 박정희는 영등포에 있는 6관구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의 지휘소에 있었다. 한강대교에서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나 군인들은 별 저항없이 서울시청 치안국 KBS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이날 새벽 2시경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장면총리가 전화 통화를 나눈다. 새벽 3시경 미국 대사와와 주한미군사령관이 군 움직임 소식을 듣고 지지하지 않기로 의견을 나눈다.
15일 밤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6군단 포병대는 새벽 3시 30분경 용산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를 장악한다. 박정희와 해병대는 한강대교를 건너기 위해 헌병과 1시간 가량 대치한다. 새벽 4시가 넘어서면서 해병대와 공수단이 서울시내로 들어와 주요 건물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공수단은 남산의 방송국, 해병대는 서울시청과 치안국, 중앙전신국을 점령한다. 이때쯤 박정희는 장도영 총장에게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한다. 장도영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 장면 총리는 피신한다.
새벽 4시에서 새벽 5시 사이 대구는 이미 군 쿠데타세력 수중에 떨어졌다. 경북도청과 경찰국 및 경찰서 3개, 소방서, 방송국 등이 반란군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되어 경북도청을 비롯, 경찰국과 경찰서 등 주요 기관에 무장 군인이 수십명씩 배치되었다.

새벽 5시 방송을 통해 쿠데타가 알려진다. 방송국을 점령한 군인들은 혁명 공약을 발표한다. 육군본부와 중앙방송국(KBS) 뉴스가 군사혁명을 알렸다. 주요내용은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새벽 7시를 기해 부산에 주둔 중이던 헌병 2개 중대가 부산 내 주요시설을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들은 완전무장한 채로 대기하다가 약 10시 30분부터 2개 중대가 부산 방송국, 남전 부산지점(발전소), 부산 전화국, 코스코 유류 저장소 등에 나타나 이를 경비하기 시작하였다. 경남도청과 경찰국 등 관공서 또한 기능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산시내 도청, 법원, 검찰청, 시청 등에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전 9시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 계엄이 선포된다. 오전 10시 18분 미국 8군 대변인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뒤이어 미국 대사가 미국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8군방송과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만 보도됐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미군과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군 진압을 놓고 의견을 나누나 결론은 내지 못한다. 미국은 쿠데타 반대 입장이며 쿠데타를 승인하면 한국은 오랜기간 군사독재에 들어갈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원주에 있는 이한림 1군사령관은 쿠데타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윤보선은 유혈 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 군 움직임 자제를 당부한다.

오후 5시 포고령이 발표된다. 국회(민의원과 참의원) 해산을 명한다.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국무위원과 정무위원은 모두 체포한다. 헌법기관 중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구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한다. 포고 4호

이로서 아무런 걸림돌이나 장애물없이 5.16은 성공한다. 장면 총리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이나 승인 등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시간만 보낸다.

당시 국군통수권자였던 장면 국무총리는 반포호텔에 있었으나 곧바로 혜화동성당으로 피신해 미국의 조치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으며 대통령 윤보선은 “올것이 왔다”는 식으로 체념했다. 쿠데타는 어떤 저항도 크게 받지 않고 곧바로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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