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시리즈)1963년 프랑스 독일 ‘엘리제 조약’...“웬수에서 친한 우방으로”
(63시리즈)1963년 프랑스 독일 ‘엘리제 조약’...“웬수에서 친한 우방으로”
  • 최용희 기자
  • 승인 2023.03.0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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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과 아데나워 ‘세계 질서는 미국 영국 소련 아닌 유럽 중심’ 의견 접근
독일은 전쟁국 이미지 벗는 효과노려... 미국 강력 반대에 내용 수정
프랑스 상징인 에펠탑과 독일의 브란덴부르그문.
프랑스 상징인 에펠탑과 독일의 브란덴부르그문.

 1963년 1월 22일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독일 총리와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프랑스 대통령이 오랫동안 원수같았던 역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화해협력조약을 맺었다. 이른바 ‘엘리제 조약’이다. 두 나라는 오랜 앙숙 관계를 청산하고 친한 친구가 되기로 했다. 두 정상이 매년 2번 이상 만나고 정기 장관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 청소년 교류를 확대하고 원자로 공동연구, 우주항공산업 기술교류, 환경협의회 및 양국 교육대학과 문화협의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군사적 대결금지를 위한 독불군사연대의 창설에도 합의했다.

조약을 체결하기 전 드골과 아데나워는 상대방 사저를 각각 방문하며 친분을 쌓았다. 드골 대통령은 아데나워를 자신의 시골집으로 초청했다. 아데나워는 드골을 1961년과 1962년 두 번이나 본 근교의 그의 사저로 초청했다. 당시 드골은 72세, 아데나워 87세였다.
화해 협력은 독일이 속죄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가능했다. 독일은 주변국의 안보적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독일의 국익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다. 제2차 대전 이후 독일은 과거사 반성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줌으로써 이웃 국가에 다가갔다.
 이 조약은 프랑스와 독일 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위대한 첫걸음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면에는 복잡하고 치열한 국제 파워게임이 숨겨져 있다. 무엇보다 세계의 경찰국가로 떠오른 미국의 반대가 완강했다. 드골은 원래 2차대전 이후 독일을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보다도 드골은 영국과 소련 미국이 이끄는 세계 질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유럽은 유럽인의 손으로 이끌어가고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질서 체제를 꿈꿨다. 그는 독일과 협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마침내 독일과 손을 잡는다. 독일의 아데나워는 드골의 구상에 찬성했다. 또한 독일이 유럽에서 재기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드골과 아데나워의 협상 내용이 알려지자 미국은 분노했다. 조약 내용에는 유럽의 안전을 지키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언급이 없고, 미국이나 영국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드골을 불신했고 미국의 ‘유럽 정책’을 위협한다고 여겼다. 미국은 독일과 프랑스에 강력한 외교적 압박을 가한다. 독일은 결국 △유럽과 미국 협력 강화△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노력 △ NATO 안에서 국방협력 △영국과 미국 관세장벽 철폐를 협약 내용에 삽입한다. 드골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엘리제 조약은 프랑스-독일의 우호를 상징하게 되었고 유럽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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