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시리즈)1964년 맥아더 눈을 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시켜
(64시리즈)1964년 맥아더 눈을 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시켜
  • 최용희 기자
  • 승인 2024.02.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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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최고 사령관 활약...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서 참관도
‘노병은 죽지않고 사라질 뿐이다’ 명언 남겨, 대통령 꿈은 이루지 못해
1964년 한국에서 열린 맥아더장군 추모식.

 '노병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 미국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가 1964년 눈을 감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중공군과 확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됐다. 한때 미국 대통령을 노리기도 했으나 이루지는 못했다. 맥아더가 진정한 전쟁 영웅이었는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 했던 전쟁광이었는 지는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맥아더는 1880년 미국 아칸소(Arkansas)주 리틀록(Little Rock)에서 출생했다. 집안은 스코틀랜드계로 명문 군인 집안이었다. 1893년 텍사스군사학교(Texas Military Institute)에 입학, 1899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입학하여 1903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해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공병대에 배속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필리핀에서 근무했으며. 1904년 당시 육군소장인 아버지 맥아더 아서 2세의 부관이 되었다. 1905년 조선에서 일어난 러일전쟁을 참관하기도 했다. 1917년 '레인보 사단'으로 불린 제42보병사단의 참모장에 배속되어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었고 임시 육군 준장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무공을 세웠으며 7번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으며 뛰어난 지휘관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19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해 미국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0년 정식 육군 준장이 되었다.

1957년 인천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 동상.

 1922년 10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925년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1926년  육군 제3군단장에 취임하였고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올림픽대회 때는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하는 미국 제9단장이 되었으며 그해 11월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36년 필리핀군(軍)의 군사고문으로 근무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갔다. 이때 육군 소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가 그의 부관이었다. 1937년 퇴역하여 예비역 대장이 되었다.

 1941년 맥아더는 군사고문에서 미 육군 소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여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United Armed Forces in the Far East)이 되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마닐라를 빼앗기고 1942년 3월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다.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일작전을 지휘하였다. 그 해 가을부터 영국군, 호주군이 참전한 뉴기니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하였고, 1944년 필리핀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고 그해 5성 장군이 되었다.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奪還)하였고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였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고, 9월 미 해군 전함 미주리 호에서 일본 천황으로 부터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조인식을 주관하였다. 이후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으며 일본 군정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후 전범재판인 극동국제군사재판을 맡았다. 일본을 점령한 동안에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토지개혁 등 여러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시민권, 남녀평등권, 노동조합법 등 여러가지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자신의 전용 비행기인 바탄(Bataan)기를 타고 한반도 정찰을 감행하였다. 수원에 착륙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고 한강 이남의 정세를 직접 정찰하였다.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 육군 제24, 제25사단이 방어전을 펼쳤고 일본에 주둔하는 제8군을 한반도로 이동시켰다. 불리한 한반도 정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상륙작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본국에 설득하였고 7월 25일 미국 합참을 통해 승인을 받았다. 1950년 9월 15일 바닷물이 차올라 만조가 되는 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인민군을 압록강 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하게 되자 만주폭격과 중국연안봉쇄, 대만의 국부군(國府軍)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해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에서 해임됐다.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노병(老兵)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1964년 4월 5일 워싱턴 월터육군병원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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