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시리즈)1964년 한국, 베트남 전쟁에 발을 들여놓다
(64시리즈)1964년 한국, 베트남 전쟁에 발을 들여놓다
  • 최용희 기자
  • 승인 2024.03.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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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진과 태권도 교관 등 군 140명 파병해
자유 지키고 달러 벌고 한반도에 미국 붙잡아둘 명목도

 

1964년 베트남 군대 파견 환송식.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이제서 돌아왔네/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너무나 기다렸네/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웃으며 돌아왔네/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모두 다 안겼네/말썽 많은 김 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 상사/동네 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모두 다 기웃기웃/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온 동네 잔치하네/폼을 내는 김 상사 돌아온 김 상사/내 맘에 들었어요/믿음직한 김 상사 돌아온 김 상사/내 맘에 들었어요

 중장년이면 다 알만한 김추자가 부른 노래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의 가사이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갈수 있고 한국과도 친근한 국가의 하나인 베트남이 바로 월남이다. 베트남 다낭은 경기도 다낭시로 불릴 정도로 한국인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베트남도 우리나라 만큼이나 많은 역사적 아픔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오랫동안 서방의 지배를 받아오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미국 등 강대국들과의 전쟁에 다시 휘말린다.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면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동서 양진영의 대결의 장이 되고만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근의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등도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이미 1961년에 파병 의사를 밝혔던 한국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미국은 1964년 5월 한국에 ‘1개 이동 외과병원’ 파병을 요청한다. 정부는 1964년 6월 10일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병하겠다고 통보한다. 그해 7월 31일 파병동의안을 국회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결한다. 9월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등 140명을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파견한다.  9월 11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23일 환영행사에 참가한 국군은 9월 25일 붕따우에 도착하여, 9월 28일 본격 활동을 시작한다.

이어 1965년부터는 전투 부대 파병이 이어졌으며 수도사단(맹호부대), 제2해병여단(청룡부대)과 1966년에는 제9보병사단(백마부대)의 파견으로 연인원 30만 명, 최대 5만 명이 파병되었다.

박정희의 베트남 군대 파병은 그야말로 다목적이었다. 서방 진영을 지킨다는 명분아래 군사 지원을 함으로써 달러를 벌어들일 기회가 생겼고,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들 명분까지 생겼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은 대한민국에 어두운 그림자도 남겼다. 지금도 월남전 참전 용사들의 모임이 월남전 참전 용사회와 고엽제로 고통을 받는 고엽제 전우회가 있다. 1973년 3월 파리협정에 따라 철수할때까지 통계에 따르면 5099명이 사망했고 11232명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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