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나면 아기가 생겨"… 베이비붐 세대 인구 폭발
"자고나면 아기가 생겨"… 베이비붐 세대 인구 폭발
  • 이두 기자
  • 승인 2016.05.30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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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특집3> 전후 남자들 가정복귀, 남아선호, 높은 사산, 축첩 등 영향

 

1955년 열린 우량아선발대회. 전쟁이 끝나자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사진제공/인천시

  한국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1955년부터 1963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700만명에 달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5년도 남한인구는 2150만명이었다. 1960년에는 2498만여명이었다. 불과 5년 사이에 350만명이 늘었다. 사망자를 제외하고도 한해평균 거의 70만명씩 늘었다는 계산이다.
​  1950년대 중반부터 왜 이렇게 인구가 급격히 늘었을 까. 첫째 전쟁이 끝나자 남자들이 가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가정이 꾸며지고 총각들은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특별한 오락물이 없었다. 기나긴 밤시간 부부가 붙어있다 보니 자식들이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다. 열심히 열심히 아기를 만들었다.
  둘째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작용했다. 당시만해도 여자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딸만 주루룩인 칠공주집·팔공주집이 흔했다. 부모들은 시부모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고추달린 자식을 볼때까지 아기를 낳아야만 했다. 대를 잇기위해 군대에 간 아들의 훈련소까지 찾아가 며느리의 합방을 주선하는 ‘씨받이 면회’도 이뤄졌다고 한다.
​  셋째 조선때부터 내려온 축첩제도가 강하게 남아있었다. 여성 단체는 첩제도를 없애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이승만정부에 공무원 자격으로 첩이 있는 자는 안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실효성이 없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본처에서 낳은 자식이 없어 서자를 입적시키는 데 본부인의 동의를 구하는 것은 풍속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첩을 둔 고관대작이나 유명인사도 적지 않았다. 한예로 1956년 경찰총경 12명이 파면되었다. 이중 8명이 첩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넷째 높은 사산율도 한몫했다. 출산시 아기는 물론이고 산모도 생명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베이비붐세대 중 형제자매 한두명은 출생이나 출생직후 숨을 거뒀다. 당시는 산부인과의사가 없었다. 이웃동네 할머니가 산모가 낳는 아기를 받아내기도 했다. 산모가 아기를 낳으며 자신의 탯줄을 직접 가위로 자르는 위험한 경우도 있었다. 아기의 백일잔치는 태어난 후 백일동안 잘 살아있어서 축하하는 것이고 돌잔치는 첫 생일을 맞았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아직 농업사회였다. 1950년대 도시화 비율은 20%선이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많은 손이 필요했다. 농사를 짓고 먹고사는데 자식들도 하나의 생산수단이었다.
​  1955년~1960년 부부의 평균자녀수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은 6.3명이었다. 이 때만해도 자녀수는 최소 6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정부는 1962년 가족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많이 낳아 고생말고 적게 낳아 잘기르자’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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