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20대 나이에 러일전쟁 관전하며 조선과 인연
맥아더, 20대 나이에 러일전쟁 관전하며 조선과 인연
  • 이두 기자
  • 승인 2016.06.22 0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곧 개봉 … 이승만과 친해, "군사식견 탁월한 영친왕에 군 맡기려해"

 

맥아더는 인천수복후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맥아더(1880~1964) 장군의 활약상이 담긴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7월 개봉된다. 영화배우 리암니슨이 맥아더역을 맡았다. 리암니슨은 “맥아더를 영웅으로만 그리고 싶지 않다. 인간 맥아더를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맥아더는 과연 한국과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맥아더는 1904년부터 1905년 조선 일대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을 참관함으로써 조선과 인연을 맺는다. 아버지인 아서맥아더(1845~1912)의 러일전쟁 관전무관(觀戰武官)으로 러일전쟁을 직접 관전한다. 맥아더는 아버지의 부관으로 전쟁을 관전한다. 압록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 군대를 보게된다. 맥아더는 이때 일본군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같은 인상이 2차세계대전과 종전 후 일본을 처리할 때 적지않게 작용했다.
 아버지인 아서맥아더는 고종황제를 만나 고려자기를 선물로 받았다. 맥아더는 아버지로부터 고려자기를 물려받았다. 태평양전쟁당시 일본군 공격에 밀려 필리핀 탈출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비둘기가 자주 찾아온다.

연합군총사령관 시절 맥아더는 일본에 있는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을 만나려했다.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영친왕에 생활용품을 지원하는 등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영친왕은 답례로 조선백자를 선물로 보냈다. 두 사람은 만나려했으나 맥아더가 해임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맥아더가 일본군 장군을 지내며 탁월한 군사적 식견이 있는 영친왕을 한국전쟁의 지휘관으로 고려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맥아더와 이승만은 아주 가까웠다. 맥아더는 소령때부터 이승만을 알고 있었다. 8.15 해방후 이승만 귀국때 맥아더는 일본에서 남한을 총책임지고 있는 사령관 하지중장을 소개해 이승만의 입지를 넓혀줬다. 맥아더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 참가했다. 이승만이 남한이 공격받으면 어떡할 것이냐 묻자 미국 캘리포니아를 방어하는 것처럼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맥아더는 일본으로 이승만을 초청하기도 했다.
 1950년 6.25가 나자 맥아더는 6월 29일 한국상황을 알기 위해 수원에 도착했다. 이승만대통령을 만났으며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다. 그는 워싱턴에 미국 지상군을 파견을 건의해 실행에 옮겼다.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9월 29일 서울수복기념식에 참석하고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 맥아더가 트루만과 불화로 해임되자 이승만은 “워싱턴은 한국전선의 기둥을 뽑아가 버렸다”고 맥아더의 퇴진을 안타까워했다.
  1957년 서울과 인천에 맥아더동상이 세워졌다. 서울은 광화문 지금 KT건물 자리에, 인천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자유공원에 들어선다. 서울 동상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른다. 인천에 있는 맥아더 동상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월미도를 바라보고 있다. 동상 철거여부를 놓고 몇 년전부터 매년 9월 중순경 진보 보수 진영간의 충돌이 빚어지고 있다.
 전역후 기업 고문을 잠시 지내다 야인으로 지내던 맥아더는 1962년 미국을 방문한 김종필을 만난다. 맥아더는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때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