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일련의 순간들을 모은 것이다. 그 순간들은 강물처럼 연속으로 이어져있지 않고 물웅덩이처럼 하나씩 조각나있다. 그 물웅덩이 하나하나를 우리는 기억이라고 부르고 기억중에서도 삶에 희망과 긍정을 투영하는 맑은 웅덩이를 추억이라고 부른다. 이 '추억'의 진가는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후에 발휘된다.
대부분 인간의 고통은 먼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비롯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부모와 연관되어있고 젊은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연인과 연관되어있다. 남녀간의 사랑은 아무리 강렬했던 간에 순간적(momentary)이다. 그 순간은 집요했지만 지나고나면 폭풍후의 적요가 찾아온다. 떠나간 것은 떠나간 것이다. 또다른 사랑이 빈자리를 채우거나 다른 가치로 전이한다.
그러나 부모와의 관계는 한쪽의 죽음으로 종결지어지기전까지 벗겨지지않는 옷처럼 입고 다녀야한다. 의무,복종,지나친 기대,나무람,몰이해,무뚝뚝함,반항,이탈,고함,대화의 끊어짐.생활의 곤경,장소의 불일치등이 누적되어 불화를 형성한다. 자신을 남기려는 부모와 자신을 지키려는 자식간의 투쟁(?)의 파편인 불화는 때로는 드러나고 때로는 감춰진채 수십년을 가는 경우도 흔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의 삶'을 완성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이 불화의 화해'가 필요하다. 불화를 축적하는 데는 많은 나쁜 '기억'들이 필요하지만 화해를 허여하는데는 놀랍게도 '단 한가지' 또는 몇가지 '추억'만으로도 충분하다. 긴 불화의 어두운 터널의 끝에서 밝은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추억의 에너지'이다. 어린 시절 등에 업혀 겨울 시냇물을 건넜던 기억, 열차여행에서 마주보며 환히 웃었던 기억, 말없이 안아주던 손길... 따뜻하고 좋았던 짦은 순간의 추억이 우리를 긴 불화에서 영원한 화해의 길로 이끈다. 이것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