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출신 독립운동가 조봉암, 다시 주목받다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 조봉암, 다시 주목받다
  • 이두 기자
  • 승인 2017.08.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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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추모제, 동상건립 지지부진… "한국정치에 진보의 씨앗뿌려"

 

재판정에서의 조봉암. 1959년 사형이 집행된다.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 죽산 조봉암(曺奉岩·1899∼1959)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우선 그의 동상 건립이 8년째 지지부진하다. 지난 7월 31일에는 서울 망우리에서 58주년 추모제가 성대히 열렸다. 동상운동 건립 모금은 지난 2010년부터 8년째 펼쳐지고 있다.
 동상 건립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인천새얼문화재단에 따르면 재단 측은 2011년부터 죽산 선생의 동상 건립을 위한 사업비를 모금해 현재까지 8억여원을 모았다. 재단은 2010년 1월 죽산 선생의 간첩 혐의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뒤부터 모금 운동을 하고 있다. 
 재단 측은 죽산 선생의 서거 60주기가 되는 2019년에 동상을 건립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내년께 추진위원회를 꾸려 모든 절차를 마친다는 계획이다. 죽산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은 이 밖에도 생가 복원과 추모공원 조성 등이 추진되고 있지만 역시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조봉암의 58주기 추모제는 지난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에서 열렸다. 이번 추모제에는 58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영정 앞에 놓였다.  추모제에는 조동암 인천시부시장,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 등 인천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58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이들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광복 후 만인이 평등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설계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며 그의 영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기를 기대했다.

강화에 있는 조봉암 생가터 표지석.

◆조봉암과 강화
 조봉암은 1899년 강화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의 자전적 기록에 ‘강화도 남면 원면이라는 촌에서 나서 강화읍에서 자랐다’고 되어있다. 그래서 선원군 금월리 가지마을로 추정된다. 가지마을에서 가까운 남산대에서 태어났다는 증언도 있다. 1908년 강화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12년 졸업했다. 바로 2년제 농업보습학교에 들어갔다. 조봉암은 농업기술은 재미가 없었지만 숫자에 흥미를 느껴 수 계산이 빨랐다고 한다. 졸업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강화군청의 급사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베께 주민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23세때 일본 유학을 떠난다.
 강화역사관 입구에는 조봉암선생 추모비가 있다. 2001년 추모사업회가 새얼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550번지에는 선생의 생가터 표지석이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워진 것이다.

◆조봉암과 정치, 그리고 이승만
 일제 강점기때 죽산은 치열한 항일 운동을 벌인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후 광복 때까지 일본 경찰에 3번 체포돼 7년간 옥살이를 한다. 해방이 되자 정치에 본격 뛰어든다. 광복 후 정부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식량난과 토지개혁 문제였다. 이승만 정권이 출범할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조봉암은 1948년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조봉암은 정부가 양곡을 매입하고 배급하는 방안을 마련했고, 농촌개혁을 이끌 농민조직 결성을 주도했다.
 인천을구(현재 부평, 계양, 서구 일대)에서 제헌의원(1948년)와 2대의원(1950년)에 당선됐다. 1952년에는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한다. 이승만과 갈라지는 계기가 된다. 1954년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못한다.
 1955년 진보당창당준비위원회를 만들고 1956년에는 야당 단일후보로 대통령에 나섰다. 극심한 부정 선거 속에 낙선했다. 1958년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 체포됐다. 북한의 공작금의 받았다는 간첩 혐의와 진보당에서 내건 평화통일론이 실정법을 위반했다며 국가보안법 혐의를 씌웠다.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됐으나 2심과 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재심 청구가 기각되면서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이후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대법원이 2년여의 심리 끝에 2011년 1월 무죄 판결을 내려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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