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기출신 군 대부 야마가타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시리즈 11)
일본 하기출신 군 대부 야마가타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시리즈 11)
  • 이두 기자
  • 승인 2017.10.0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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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침략과 강제병합에 절대 역할… 조선 정탐위해 여러차례 정탐꾼 보내

 

일본 하기시 공원에 있는 야마가타의 동상.

◆일본군대 창설 군국주의 토대 마련… 이토 히로부미 죽자 일본 최대 실세로
 일본 하기(萩)시 출신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는 한국인에 그리 낯익은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 못지않게 조선 침략과 강제 합병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일본 ‘육군의 교황’으로 불린다. 일본군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군국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일본은 주권선, 조선은 이익선’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침략을 정당화했다.

◆창고지기 아들서 일본군의 대부로
 그는 1838년 하기에서 창고지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이 낮은 무사계급인 아시가루(足輕)였다. 어려서부터 창술을 익히는 등 무인기질을 보였다. 창술도장을 여는 것이 한때 꿈이었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교육을 받으며 정보수집꾼으로 활동한다. 1863년 다카스키 신사쿠가 조직한 기병대에 들어가 2인자가 된다. 1866년 막부 2차 조슈정벌전과 1868년 보신전쟁에서 전공을 세운다. 1868년 유럽 각국을 돌아다녔으며 독일식 군제를 연구한다. 독일제국 건국 기념식을 보고 프로이센처럼 국민을 군대식 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872년 공금부정 사건에 휘말리나 육군경에 복직해 일본 육군 창설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1873년 초대 육군경에 취임해 징병령을 실시한다. 1877년 서남전쟁때 반정부군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무라이군을 물리쳐 군의 최대 정점으로 떠오른다. 육군경 시절 그는 조선을 정탐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정탐꾼을 조선에 보낸다. 특히 일본에 유리한 개항지역을 찾아내기 위해 목포 옥구 군산 아산 남양주 제물포 강화 등 서해 일대를 샅샅이 뒤지도록 한다. 이때 활동한 인물이 초대 일본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다.
 1883년 내무경이 되어 일본 경찰 제도의 토대를 마련한다. 1889년 일본 의회제의 첫 총리대신으로 3대 총리가 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조슈번의 대표 원로로 일본 정계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는 일본국민들에게 일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국가주의를 심었다.
 하기 출신 인맥은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력과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정점으로한 군부로 나뉜다. 특히 군부 인맥은 막강했다. 그는 ‘일본 육군의 교황’으로 불리었다. 일본제국의 군과 정부에 최대 영향력을 행사였다. 한일 강제병합 직전엔 이토 히로부미의 위세를 능가했다.
 ◆청일전쟁때 조선원정군사령관
 그는 임오군란 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한다. 군함 48척을 건조하고 군비 확장 및 군사비 증액 등을 결정한다. 군제를 기동성을 갖춘 사단사령부제로 바꾸고 육군도 공격진용으로 개편해 청일전쟁때까지 7개 사단을 새로이 편성한다.
 1889년에는 일본의회제의 첫 총리가 된다. 육군대장으로 승진해 군 통수권을 손아귀에 넣는다. 1890년 소위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이라는 내용이 담긴 ‘야마가타 아리토모 의견서’를 제출한다. 내용은 이렇다
'한 나라가 이익선을 잃어버리면 주권선이 위태로워지고, 이익선을 얻으면 주권선이 안정된다. 그러므로 이익선을 확보하는 것이야마로 일본 대외정책의 핵심이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러시아는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이익선인 조선을 지켜야 한다.’
 1894년 청일전쟁이 나자 그는 조선원정군사령군이 되어 군을 지휘한다. 그는 조선에 온 일본 병사들에게 “아무리 비상한 난전이 벌어지더라고 결코 적에게 생포되어서는 안된다. 차라리 깨끗한 죽음으로 일본 남아의 기상을 보여주고 명예를 지켜라”라고 했다. 훗날 자살특공대가 되는 가미가제 군인 정신의 하나가 된 셈이다.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가 청일전쟁의 종전을 추진하자 불만을 품고 ‘조선 정책’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해 일본의 이익선을 확장해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본영의 지시를 무시하고 중국 북경까지 점령하겠다고 해 일본을 놀라게 한다.
 ◆러시아에 한반도 분할 제안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입지가 좁아지자 야마가타는 러시아 외무상 로스토프스키를 만나 한반도를 북위 39도(대동강~원산만)를 경계로 남북 분할하자고 제의한다. 러시아는 거절하고 이 사실을 안 고종은 러시아 고문을 해고하고 러시아은행을 폐쇄하는 등 강경하게 나간다.
 1898년 두 번째 내각총리대신이 된 야마가타는 전쟁을 준비한다. 현역 장교가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이 될 수 있다고 규정을 바꿔 사실상 군부를 민간통제에서 벗어나게 했다.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조선에서 경부선 경의선 철도 건설을 추진한다. 영일동맹의 골자는 한 나라가 전쟁을 하면 중립을 지키고, 두 나라 이상과 전쟁을 하면 군사적인 원조를 의무화 한다는 것이다.
 1904년 2월 4일 러일전쟁이 결정되자 야마가타는 제1군사령관겸 참모총장을 맡아 도쿄에서 작전을 총지휘한다. 같은 하기 출신인 가쓰라 다로는 수상, 데라우치 마시타케는 육상을 맡아 그를 보좌한다.
 1905년 일본은 러시아 발틱함대가 온다는 사실을 접하고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한다. 그해 2월 22일 독도를 시마네현에 포함시키고 다케시마로 부르기 시작한다. 러일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를 탈취해 간 것이다.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군출신을 모조리 조선에 배치한다. 초대 조선총독에 육군대장 테라우치 마시다케, 조선주차군 참모장에 중장 아카시 겐자로, 동양척식주식회사 초대 총재에 중장 우사카와 가즈마사를 임명한다. 조선총독부는 총리의 감독과 관리를 받을 필요가 없어 군인이 이끌어가는 셈이 되어버렸다. 조선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무단통치를 벌였다.

야마가타의 밀랍 인형.

◆용인술 탁월, 부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맞는 일 부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용인술이 탁월했다. 사람을 쓸 때 여러 가지 일을 시켜보며 능력을 판단한 뒤 그 인물에 맞게 일을 부여하고 중용했다. 부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부하의 일을 성공하도록 유도하니 자연히 아리토모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일개 무사에 불과하다”며 후배들을 많이 키운 것도 커다란 파벌을 형성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일본과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한 전시비상계획을 수립하고 군인의 내각 참여를 허용해 군국주의로 가는 지름길을 만든다. ‘의는 산악보다 무겁고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게 여겨야 한다’는 군인칙유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치인의 군사개입 막아내며 군인이 정치에는 개입했다. 정치인의 군사개입 막기위해 1878년 참모본부 설치한다. 초대 본부장에 자신이 취임한다. 군국주의 길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제국헌법 11조에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규정. 정부와 의회도 군대는 통제 못한다는 의미로 오로지 천황만이 가능하다고 되어있다.
 이토 히로부미와 달리 권력과 재물에 집착했다. 그래서 메이지 일왕은 그보다 이토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군인의 역량은 인정받았다고 한다. 러일전쟁 공로로 공작이 되었다. 말년에 태자 히로히토 결혼 문제에 간여하다 망신을 당했다. 1922년 세상 떠날 때까지 국정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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