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신미양요, 조선과 미국 무력 충돌로 ‘첫 만남’(시리즈18)
1871년 신미양요, 조선과 미국 무력 충돌로 ‘첫 만남’(시리즈18)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8.01.01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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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셔먼호 응징과 통상 요구하며 미군 1200명 강화도 상륙.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 350명 전사 “국가 위해 장렬하게 싸워”

 

강화 광성보 용두돈대. 신미양요때 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곳이다.

1866년 조선은 서양과 본격적인 무력 충돌을 겪는다. 조선은 그 해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다. 프랑스군과는 강화도에서 전투를 벌였다.
 미국은 여러 차례 중국과 일본을 통해 조선의 개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정책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마침내 1871년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있던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나가사키를 출발해 조선으로 향한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조선이 협상에 불응할 경우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력 행사를 해 강제로 조선을 개항시키려했다. 5월 19일 서해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인천 쪽으로 북상했다. 작약도(당시 물치도)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했다. 미군은 조선에 조선의 해안을 탐색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보냈다. 쇄국 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했다.
 미군은 이에 아랑곳않고 6월 1일 강화해협 항행을 강행하며 탐사를 시작했다. 함대가 물살이 센 강화해협의 손돌목에 이르렀을 때 연안 강화포대에 있던 조선이 기습 공격을 했다. 조선과 미국간에 벌어진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었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삼아 오히려 조선 정부에 사과와 손해 배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거부했다.
 6월 10일 미군은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한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다음날인 11일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한다.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진지 점령에 나선다. 광성보에는 사령관인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 조선군은 350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다쳤다.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조선군은 처참히 패배했다.
 

강화전쟁박물관에 가면 미군에 빼앗긴 수자기와 신미양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어재연 장군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무장이었다. 그는 전세의 불리함을 맨몸으로 막았다.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광성보 전투에 참가했던 조선 군인들의 용맹성과 애국심은 미국 군인에 큰 인상을 남겼다. 미군들은 이후 “조선군은 전 근대적인 노후한 무기를 가지고 미군의 현대적인 총포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 죽었다”“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저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며 조선군의 용맹성을 찬양했다.
 6월 12일 미군은 광성보에서 철수하면서 파괴와 방화 약탈을 감행한다. 부평부사와 미국측은 서로를 비난하는 편지를 주고받는다. 미국 측은 “평화적 통상 요구를 조선이 불응했다. 국왕에 회신 전해달라”고 했다. 부평부사는 “강화 상륙은 명백한 도발 행위이자 해적 소행이다. 미국 공사의 서신은 조선 예법에 어긋나 조정에 전할 수 없다” 고 답했다. 미군은 더 이상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자 조선에서 철수한다..
 

강화 광성보 손돌목돈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강화 등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척화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신미립(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 풀이는 이렇다.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요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쓰고 신미년에 세우다'
 이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할 때까지 조선은 개국의 문을 더욱 꽁꽁 걸어잠갔다.

◆미 상선 제너럴셔먼호 대동강까지 올라와 무력 행사
 1866년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온다. 아시아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한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였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W.B)의 선박으로 중국 톈진(天津)에 기항 중이었다, 그곳에 주재하던 영국 메도즈상사(Meadows and Company)와 용선 계약을 체결해 계약기간 중 셔먼호는 영국 상사에 위탁되어 있었다. 셔먼호는 80톤급 증기선으로 대포 2문을 갖추고 있었으며 선원들도 완전 무장 상태였다.
 메도즈상사는 셔먼호에 조선과 교역할 상품을 싣고,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Thomas,R.J., 崔蘭軒)를 통역관으로 채용한 뒤 8월 9일 즈푸(芝芣)를 출항, 조선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셔먼호의 승무원은 선주 프레스턴, 선장 페이지(Page), 항해사 윌슨(Wilson) 등 미국인 3명, 통역 담당 토머스, 화물 관리인 호가스(Hogarth) 등 영국인 2명, 그리고 기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19명으로 총 24명이었다. 셔먼호 승조원의 주역은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셔먼호를 타기 전에 이미 조선 포교의 꿈을 가지고 조선 해역을 두 차례 방문한 일이 있었다. 조선이야말로 선교의 최적지임을 확신하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날을 학수고대하던 끝에 때마침 셔먼호 통역으로 채용되어 대망의 조선행 꿈을 실천에 옮겼다.
 셔먼호는 백령도 일대를 거쳐, 대동강 하구의 급수문(急水門)을 지나 거침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셔먼호의 승조원들은 프랑스 신부를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관리는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절대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 대동강으로 오지 말라고 강력히 만류했다.
 셔먼호는 항행을 강행, 드디어 평양 만경대(萬景臺)까지 올라왔다. 조선은 셔먼호의 무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유원지의(柔遠之義)에 따라 세 차례나 음식물을 후하게 공급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셔먼호는 장마비로 불어난 강물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으나 장마비가 그치자 갑자기 수량이 줄어들어 운항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셔먼호 승조원들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조선 군사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자행했다. 화가 난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가 화공으로 셔먼호 불태우고 선원들은 몰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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