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홍진을 아시나요
독립운동가 홍진을 아시나요
  • 이경현 기자
  • 승인 2018.03.2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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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자유공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 주도… 한성임시정부 탄생에 주도적 역할

 

여의도 국회도서관의 홍진 전시관.

독립운동가 홍진(洪震·1877~1946)은 일반 국민들에게 그다지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임시정부 수립의 토대가 된 한성정부를 수립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임시정부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인천과도 인연이 깊다. 1919년 한성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인천에서 열린 전국 13도 대표자 회의를 이끌었다. 광복 후 귀국했으나 1946년 별세했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인천에 묻혀있었다.

◆전국 13도 대표자 회의 주도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4월 2일 인천 자유공원(당시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으로 불림)에서 전국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한성정부 수립을 공포하는 자리였다. 대표자 회의에서 국민 대회를 총괄할 책임자로 검사에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홍진과 한남수를 선임했다.
13도 대표자대회는 ‘국민대회취지서’와 ‘임시정부약법’을 검토하고 이를 채택했다. 헌법에 해당하는 약법까지 채택함으로서 정부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한성임시정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대표자회의가 끝난 지 며칠 후 홍진은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상의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다.
 홍진이 한성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인천자유공원에서 대표자 회의를 가진 것은 인천에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의 한 연구관은 "홍진이 대회 장소로 서울이 아닌 인천을 택한 것은 관교동에 가문의 선영이 있었던 데다 외국의 조계들이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진과 백범은 임시정부를 마지막까지 지킨 인물이었다. 홍진은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 의회인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좌우익 세력이 통일 의회를 꾸렸던 때였다. 백범은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6년 2월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비상국민회의 창립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고령과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9월 9일 향년 70세로 별세했다. 당시 장의위원장은 백범 김구였다.
 그는 가문의 선영이 있는 인천 관교동에 안장됐다. 홍진은 유언으로 "인천에 나의 선조들의 묘가 있고, 내가 임시정부 수립의 거사를 인천에서 하였으니 내가 죽으면 관교동의 선영에 묻어 달라"고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1984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홍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의회
 1919년 전국대표자회의 후 중국으로 건너간 후 홍진은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을 지낸다. 그는 특히 대한민국 의회정치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시정부의 의회 기능을 했던 임시의정원 의장을 세 차례나 역임했다.
 역사가들은 "홍진은 가장 오랜 기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의회정치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며 "임시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도 홍진의 큰 공헌"이라고 평가한다.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가면 홍진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홍진은 1877년 8월 27일 서울 차동(현재의 서소문)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만오(晩悟) 또는 만호(晩湖)이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선생은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를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되었다. 1905년부터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보되어 근무하던 선생은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검사직을 사직하였다.
 이후 서울과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와 변론에 노력하였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충북 청주군의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국내에서 임시정부, 즉 한성정부의 수립을 계획하였다.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3․1운동을 지도하고, 또 일제 타도 이후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복 후 1945년 12월 2일 임정 요인의 제2차 환국 때에 광복의 환희와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민족 자주성의 수호를 위하여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전국적 반탁운동 단체인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반탁운동과 건국 사업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던 중 9월 9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현충원에 있는 홍진 묘.

◆3.1운동 직후 서울서 임시정부 수립 논의
 1919년 3월 17일, 경성 내자동 한성오의 집에서는 일제의 시선을 피한 은밀한 모임이 열렸다. 모임에 참석한 인물은 홍진, 이규갑, 한남수, 김사국 등이었다. 모임을 소집한 좌장인 홍진은 구한말 검사로 재직하다 한일병탄이 일어나자 곧바로 사표를 제출한 후 감옥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 있었다.
홍진은 3.1운동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려면 중심이 필요하고 대외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날 회합에선 '한성정부' 조직안이 논의됐다. 이들은 인천 만국공원, 지금의 자유공원에 각 지역 대표들을 소집하기로 했다.
1919년 4월 23일 전국 13도를 대표하는 25명이 서울에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3ㆍ1운동의 정통성을 이은 한성임시정부는 이날 국민대회에서 약법 제1조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 등을 명시함으로써 한성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임을 명백히 밝혔다.
◆임시정부 수립에 큰 역할 한 인천 자유공원
자유공원은 1888년 조성된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자유공원은 1883년 개항으로 설정된 각국 조계지에 위치했다. 조계지는 지금의 중구 항동, 송학동, 북성동 등지를 포함하는 46만2000㎡에 이르는 면적이었다. 자유공원은 조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휴식 공간이었던 것이다.
자유공원은 독립운동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3·1운동이 계속되던 1919년 3월9일 오후 기독교 신자와 학생 약 300여명은 바로 이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강제 해산당했다.
만세운동은 시내 전역으로 번졌다. 당시 인천은 일본 도쿄에서의 '2·8 독립선언' 소식이 국내로 전달된 통로이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도 그만큼 삼엄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기 위해 지역·종교 대표자 20여명이 자유공원에 비밀리에 모였다. 엄지손가락에는 흰 종이나 헝겊을 둘러 서로를 알아봤다. 정부를 수립하려고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최초의 회합이었다.
역사전문가들은 "정부수립운동에서 13도대표자대회가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 바로 인천 만국공원의 역사적 위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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