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 강화도에서 무력 행사(시리즈 34)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 강화도에서 무력 행사(시리즈 34)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8.09.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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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운양호 사건… 강화 초지진에 의도적 상륙 시도, 영종도에서 35명 살상

 

강화도 초지진. 일본 운양호가 포격을 퍼부은 곳이다. 소나무의 당시 흔적이 남아있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펼치기 시작한 1874년 조선은 외교 노선을 바꿔 일본과 여러 차례 접촉을 갖고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양쪽의 입장이 워낙 달라 관계 정상화를 이끌어 내는데 실패한다. 일본은 결국 무력 사용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1875년 이른바 운양호 사건이다. 일본 군함은 조선의 허락도 없이 조선의 바다를 맘대로 오간다. 강화도와 영종도에 포를 발사하고 민간인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을 길들이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나타냈다.
 ◆조선 연해 탐사 명목 일본 군함 파견
 일본 정부는 군함을 파견하면서 대마도와 조선의 연해 항로를 조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1875년 5월 25일 운양호(雲揚號)함이 부산에 입항한다. 운양호는 영국이 만든 군함으로 메이지 유신을 이끈 신진세력 조슈번이 사들여 국가에 헌납한 배다. 이어 제2정묘효가 부산항에 들어와 합류한다. 두 군함은 연습을 핑계로 함포 사격을 감행해 위기감을 조성한다. 일본 군함은 동해안을 북상해 영흥만에 정박했다가 영일만과 부산항을 거쳐 나가사키로 돌아간다. 이후 외교문서를 거부하는 조선의 입장에 변화가 없자 일본은 다시 군함을 보낸다.
 1875년 9월 19일 운양호가 월미도 앞에 나타난다. 하루가 지난 20일 강화도 초지진에 나타났다. 일본인들은 먹을 물을 구한다며 조선의 허가없이 한강하구쪽으로 항해하려 했다. 조선군은 대포를 쏴 상륙을 막고 항해를 저지했다. 운양호는 음료수 보급을 구실로 초지진까지 접근해 조선군의 포격을 유도했다. 그러나 조선의 대포는 위협적이지 못했다. 이노우에는 운양호를 이끌고 강화도 초지진 쪽으로 접근해 먼저 발포했다. 초지진 포대에서도 대응 사격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쏜 대포알은 운요호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운요호에서 쏜 대포알은 초지진 포대를 강타했다. 포대는 파괴됐고 수많은 병사가 사상당했다. 운요호는 초지진 일대를 향해 두 시간 정도 폭격했다.
 강화도의 초지진은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에 휩싸였다. 영국에서 사들인 일본의 신식 전함 운양호는 160mm포와 140mm포를 장비하고 1㎞ 밖에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맞서는 초지진에는 최대사거리 7백m에 명중률도 낮은 구식 홍이포 뿐이었다.
초지진을 쑥밭으로 만든 운양호는 남하하며 항산도 포대도 공격했다. 가는 길에 인천 영종도를 공격하고 약탈했다. 이노우에는 영종성을 향해 대포를 쏘았으며 두 척의 작은 배로 해군 병사들을 보내 영종성을 함락시켰다. 일본 해군은 도주하는 조선군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해 수십여 명을 사살했다. 영종부사 이민덕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일본인들은 영종도에 상륙하여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35명의 군민 살상과 약탈을 자행하고 이들은 나가사키로 귀항했다.
운양호 사건으로 조선은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조선 정부는 영종진을 지키지 못한 영종방어사 이민덕을 파직하고 영종진을 폐지했다. 인천을 새로운 방어영으로 승격시키고 인천부사 이민중을 방어사로 겸직시키며 감독관도 겸하게했다. 이후 영종진을 부활하고 인천방어영에 속하게 함. 인천방어사가 겸직하던 감독관은 영종첨사가 겸직토록 다시 조정했다.(1883년 5월)
◆계획된 일본의 무력도발
‘운양호 사건’은 치밀하게 계획된 일본의 도발이었다. 일본은 운요호가 출항하기도 전에 ‘사건 수습’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 요지는 일본은 피해자다, 평화롭게 활동 중이던 운요호를 조선이 느닷없이 공격했으며 운요호는 어쩔 수 없이 자위권을 발동했을 뿐이라는 내용을 조선과 세계 각국에 주지시키고 피해 보상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둔갑돼 있었다.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흑색선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 평화롭게 해로를 측량하던 자신들의 배에 조선이 무단 발포했다는 흑색선전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을 피해자인 양 선전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조선에서는 세계를 향해 반론하지 못했고, 흑색선전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운요호 사건의 현장 주범인 함장 이노우에는 후안무치하게도 자신들의 영종도 약탈을 이렇게 왜곡했다.
그는 자신이 귀국후 작성한 ‘강화도 사건 최초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어제 우리의 작은 배가 해로를 측량할 때 조선 측 포대로부터 한마디의 심문도 없이 제멋대로 발포했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이대로 그냥 물러가면 나라의 치욕이 되며 더욱이 해군의 임무를 게을리한 것이 된다. 따라서 오늘 저들의 포대를 향해 그 죄를 다스리려 한다. 일동은 그 임무를 받들어 국위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라.”
◆운양호는 영국서 건조된 군함, 죠수번이 국가에 헌납
운양호(雲楊號)는 1868년 영국 에버딘에서 건조된 군함으로 메이지 유신후 신진세력으로 떠오른의 죠수번이 사들였다. 1871년 각 번들의 재산을 천황에 바치는 판적봉환으로 국가에 헌납된다. 대만정벌에 참여. 목조 쌍돛 대범선으로 총길이 35.7m, 폭 7.2m, 흘수 2.3m다. 동력은 2기통 왕복기관으로 106마력의 추진력을 갖고 있었다. 160mm포와 140mm포를 장비하고 1킬로 밖에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다. 1886년 10월 키슈우타우라에서 좌초했다.
운요오호는 조선 한반도 일대를 이미 한번 돌았다. 1875년 5월 25일 부산에 도착해 부산 해안 인근을 조사했으며 6월에는 영흥만까지 올라가 조사했다. 나가사키로 잠시 돌아간후 9월 12일 나가사키를 출발해 서해를 거쳐 강화도에 도착해 초지진을 포격한다. 영종진을 습격하고 9월 28일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지난 2009년 인천시 중구 의회에서 운양호 사건과 관련된 질의 응답이 진행됐다. 한 구의원이 프랑스와의 군사 대결은 병인양요(洋擾), 미국과의 무력 충돌은 신미양요라고 하면서, 영종도에 일본군 육전대까지 상륙하여 우리나라 병사와 교전이 이루어졌는데도 왜 운양호 사건이라고 부르냐는 것이었다. 실제 우리나라 근대사는 물론 인천 지방의 전란사, 인천 중구의 역사와 문화 등 중구에서 발간되는 책자까지 모두 축소해 운양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1875년 을해년에 발생한 사건이기에 ‘을해왜요’라고 기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청장의 견해는 어떠한지 답변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운양호 사건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기록물을 왜요라고 변경할 것을 건의할 의사는 없는지 답변을 바란다고 했다. 국가적 사건을 중구청장이 고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큰 사건이기에 그는 인천 중구사부터 적용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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