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한국의 키워드는 가난과 반공, 독재 그리고 재벌(돼지시리즈 3)
1959년 한국의 키워드는 가난과 반공, 독재 그리고 재벌(돼지시리즈 3)
  • 이두 기자
  • 승인 2019.01.2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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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반공 교육 강화, 보릿고개... 국산 라디오 대량생산 ‘신세계’
이승만은 절대자로 군림 1960년 선거 대비... 진보당수 조봉암 사형

 

1959년 남산 팔각정 이름이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으로 명명됐다.
1959년 남산 팔각정 이름이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으로 명명됐다.

 올해 환갑인 1959년생을 위한 시리즈 세 번째다. 1959년 대한민국은 어떠했는가. 6.25가 끝난지 불과 6년 밖에 되지않아 사회 전체적 분위기는 반공이 지배했다. 공산당은 죽일 놈이었으며 상종하지 못할 집단이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북송이 진행돼 북송반대 시위가 1년 내내 벌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해에 치러질 선거를 앞두고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반공은 국시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대이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 반대자인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국민들은 가난으로 보릿고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미국의 무상원조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그 와중에 재벌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가난에 허덕이던 시골 사람들은 무작정 상경을 시도, 서울로 인구 집중이 심화된다. 국내 라디오가 첫 대량 생산돼 신세계를 열었다.

반공 교육 강화...일부선 곧 통일
1959년 일선 학교에서 도덕 교육 시간이 늘어났다.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 등 당시 사회 저명인사들이 학교를 돌며 반공 계몽 강연을 하는 등 반공 교육이 강화됐다. 반공 교육과 달리 이때까지만 해도 조만간 통일을 기대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았다. 1959년 주한미국대사관 작성 보고 문헌에 통일을 기대하는 국민들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월남민들이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돈을 쓰지 않고 현금을 많이 쌓아두고 있다’  당시 상당수 국민들은 남북 분단과 대치상태가 오늘날까지 가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북진통일의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월남과 대만 그리고 한국이 힘을 발휘하면 통일이 될 것이라고 북진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강력한 정적인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이해 6월 이승만과 이기붕이 다시 대통령 부통령 후보로 확정됐으며 1960년 선거를 앞두고 선거 조직을 정비하고 교묘히 야당 탄압에 나서며 영원한 독재를 꿈꿨다. 195911일자 조선일보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야당인 장면 부통령 내외 사진을 실었다
195911월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로 조병옥과 장면이 선출된다. 신구파 갈등은 심화됐다. 자유당은 당초 내년 5월로 예정된 선거를 3월로 앞당긴다. 민주당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후보인 조병옥이 몸이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보릿고개, 재벌의 본격화
1959년도 실업자 수는 정부 추산 210만여명이었다. 당시 전체 인구는 2297만명이었다. 어린이를 빼면 성인의 30%가 넘게 실업자였다.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났다. 봄이 되면 식량이 부족한 보릿고개가 찾아와 굶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959년생 김호철씨는 초등학교 2, 3학년때로 기억된다며 학교에서 꿀꿀이죽이라며 옥수수죽을 받아먹은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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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와는 별개로 대기업과 재벌이 탄생한다. 삼성은 은행 민영화로 한일은행과 조흥은행 등 시중은행 4곳의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고 재벌이 된다. 락희 태창 삼호 등 재벌이 탄생한다. 정부의 집중 특혜 및 지원, 은행 민영화 등으로 국내 기업의 문어발 확장으로 재벌이 본격화된다.
삼성은 상업은행 조흥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로 은행 자금을 활용해 16개 계열기업을 거느리게 된다. 삼성외에 락희 삼호 개풍 동양 극동 그룹 등이 탄생한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생산돼 멀리서도 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들으며 맘껏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신세계를 열었다.

명문 중학교별 입학시험... 망국 과외 이때부터 기승
휴전후 교육열이 불붙었다. 부모들은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 못할 것이 없었다. 휴전 후 중등학교 입학 시험은 정부가 관장했다. 초등학교와 학부모는 정부 관장을, 중등학교 교장은 학교에 학생선발권을 달라고 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학교에 학생선발권을 일임하라고 지시했다. 1956년까지 중학교에서 각자 입학 시험을 치렀다. 국민학생들이 입시 부담이 커지자 정부는 1957년 무시험제를 도입하고 1958년 확산했다. 그러나 무시험제에 대한 불만이 더욱 커져나갔다. 무시험제 때문에 입학경쟁률이 높아졌으며 중학교간 격차가 심화됐다. 초등학교간 학교 격차가 크기에 공정성 문제가 대두된다. 결국 1959년 소위 명문중학교 들은 무시험을 포기하고 학교별로 입학 시험을 치러 선발한다. 담임교사 집에서 학생들을 과외를 시키는 일이 발생. 교육 과열과 망국 과외가 이때부터 기승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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