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옛이름 '한양'은 '한강의 북쪽 넓은 땅'(우리땅이야기4)
서울의 옛이름 '한양'은 '한강의 북쪽 넓은 땅'(우리땅이야기4)
  • 최재용 객원
  • 승인 2019.02.09 1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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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한양의 범위는 ‘한수북 북한남(漢水北 北漢南)’
성문밖 10리는 성저십리... 지금의 강남은 서울에 안 속해

서울, 그리고 한양

그래서 지금은 서울이 대한민국에 단 한 곳만 있는 고유명사가 됐다. 하지만 그 원뜻 새로운 땅을 생각해 보면 서울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보통명사라 할 수 있다. 어디든 새로 터를 잡은 곳은 모두 새로운 땅’, 서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땅(마을)’이라는 뜻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이름 신촌(新村)’이나 신기촌(新基村)’이라는 땅 이름이 전국 곳곳에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다만 신촌이나 신기촌은 이름 그대로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밖에 없으나 서울(새벌)’이라 하면 한 나라의 수도라는 뜻을 갖는다는 차이가 있다.
언어학적으로 딱딱한 내용이어서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하겠지만, 서라벌을 수도로 삼았던 나라 신라(新羅)’새벌이라는 뜻으로 분석된다. ‘새롭다는 뜻의 (새 신)’자로 쓰고, ‘이나 마을이라는 뜻의 (벌일 라)’자로 받아 쓴 이름이 신라인 것이다. 실제로 자는 우리나라 고대 지명에서 땅을 나타내는 말로 흔히 쓰였다.
또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부여(夫餘)의 옛 이름 소부리(所夫里)’새벌을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소부리+ 부리의 구조인데, ‘, ‘부리을 나타내는 것이다. 소부리사비(泗沘)’라고도 했으니, 백제가 멸망할 당시 수도였던 사비성(泗沘城)이 바로 그곳이다. ‘사비소부리’, 새벌이라는 뜻이다.
한편 서울의 예전 이름으로 가장 유명한 漢陽(한양)’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부터 쓰인 이름이다. 당시에는 수도가 아니었으나 삼국시대부터 지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한양군(漢陽郡)’이라 이름 짓고 중요시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한양이라는 이름과 함께 漢城(한성)’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는 더욱 많이 쓰였고, 지금의 서울 시청격인 기관의 이름도 漢城府(한성부)’였다. 한양에 ()을 쌓고 도읍(都邑)으로 정했으니 한성이 된 것이다. 여기서 ()’은 한자와는 관계없이 크다, 많다는 뜻의 우리말 하다의 관형사형 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큰 강이라는 뜻의 한강이 그렇듯 크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이 글자 그대로 한()나라, 곧 중국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에서 이 글자를 썼다는 것이다.
한편 ()’은 땅 이름에서 물의 북쪽을 뜻하는 글자이다. 한강의 북쪽에 있는 땅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쓴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양의 범위는 한수북 북한남(漢水北 北漢南)’이라 해서 한강의 북쪽, 북한산의 남쪽이 해당됐다. 북한산의 지맥(支脈)인 북쪽의 북악산(백악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목멱산), 동쪽의 낙산을 연결하는 성을 쌓아 그 안에 궁궐을 지었다. 그리고 도성의 동서남북 방향 성문(城門)으로부터 각각 10() 거리까지의 땅을 한양으로 삼았다. 한양의 범위를 나타내는 이른바 성저십리(城底十里)’라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따라서 지금의 한강 남쪽, 즉 강남 지역은 당시 한양의 범위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처럼 물(한강)의 북쪽에 있는 땅이기 때문에 자를 쓴 것이다. 결국 한양이란 한강 북쪽에 있는 넓은 땅이라는 뜻이 된다.

 

최재용은 인천토박이다. 동인천고,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인하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30년간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했다. 이전 부천시에 있는 소명여고에서 국어교사를 지냈다. '월미도가 달꼬리라구?’(다인아트·2003), ‘역사와 어원으로 찾아가는 우리 땅 이야기’(21세기북스·2015, 2016세종도서로 선정) 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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