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매직’으로 본 한국과 베트남은 ‘사돈의 나라’(돼지시리즈7)
'박항서 매직’으로 본 한국과 베트남은 ‘사돈의 나라’(돼지시리즈7)
  • 성백형 기자
  • 승인 2019.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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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 역사 비슷... 중국에 조공, 식민지배 받아
50여년전 월남전때 서로 총부리 겨눠...한국 '마음의 빚'

 

베트남 만화가가 그린 박항서 감독의 카툰.
베트남 만화가가 그린 박항서 감독의 카툰.

 1959년생인 박항서 베트남 감독의 맹활약 덕분에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1000년전부터 교류가 있어왔다. 불과 50년전에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1960년대와 1970년대초 월남전에 참전해 베트남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많은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 1992년 베트남과 한국은 다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우리 나라 정상들은 베트남 방문 때마다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이후 한국과 베트남은 다시 사이가 가까워졌으며 뜻밖에박항서 감독의 맹활약으로 더 이상 뗄래야 뗄수 없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요즘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사돈의 나라'로 부른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을 포함해 한국에 체류하는 베트남인은 13만명이나 된다. 국내 체류 외국인 188만명 가운데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다. 결혼 이주민 가운데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성의 가족이 가장 평안하다는 얘기가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유교가 맺어온 문화적 공통점이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고 있다는 평가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역사는 천년을 이어왔다. 두 나라 유학자들은 베이징에서 유학 대결을 벌였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던 시절에 한국과 베트남은 북쪽과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오랫동안 역사의 끈을 맺어왔다. 두 나라 역사는 너무나 흡사하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때론 적대적이고, 때론 조공·책봉의 화해관계를 맺어왔다.
 베트남 국부인 호 치 민(Ho Chi Minh, 胡志明)은 젊은 시절에 조선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목민심서(牧民心書)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한다. 목민심서를 47번이나 읽어 나중엔 책이 흐늘흐늘해 졌다고 한다. 베트남을 통일한 후에도 그는 목민심서를 머리맡에 두고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는 등 한국 역사와 상당부분 비슷하다. 베트남은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1940년대 호치민이 이끄는 독립동맹이 독립운동을 펼친다. 1945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베트남은 독립을 선포하나 프랑스가 다시 사이공에 괴뢰정권인 베트남을 세우며 지배하려 한다. 194611월부터 베트남 독립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독립동맹과 프랑스 군 사이에 발발하여 19547월까지 계속된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승리한 호치민은 제네바 협정에서 호찌민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 협상을 한다.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체로 끝맺었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17도선에서 남북이 분단하고, 이로써 북위 17 도선 (군사분계선, DMZ) 이북은 호찌민의 북베트남이, 이남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국(베트남어: Quốc gia Việt Nam)이 통치했다.
195410,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1955년 베트남국의 총리 고 딘 지엠(Ngo Dinh Diem)은 그의 형인 고 딘 누(Ngo Dinh Nhu)가 주도한 부정한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 바오 다이를 축출하고 스스로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 이로써 공산주의의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미국이 지원하는 베트남공화국(월남, 남베트남)이 대치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북 베트남에 폭격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은 1975년까지 계속된다.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전투원을 파견해 북베트남을 지원해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 전쟁으로 베트남인 150만 명이 사망했고, 미군은 사망자 6만여 명, 대한민국에 군인도 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그 자녀들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보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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