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때 大邱 지명 첫 등장(땅이름이야기 12)
조선 정조때 大邱 지명 첫 등장(땅이름이야기 12)
  • 최재용
  • 승인 2019.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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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大丘였으나 丘가 공자 이름이어서 이를 피하려 개칭

'우리땅 이름 이야기-대구' 시리즈 세번째다.

대구
이양채의 이 상소가 곧바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30여년쯤 지난 정조(正祖) 3(1779) 조선왕조실록大邱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고, 그때부터 大丘大邱가 함께 쓰이기 시작한다그리고 그 뒤 철종(哲宗) 임금이 즉위하면서부터는 大邱만이 쓰이게 돼 오늘에 이른다. 이양채의 상소로 조정에서 논의가 시작됐고, 결국 그의 요구가 타당하다고 인정돼 마침내 도시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邱와 모양만 다를 뿐 소리와 뜻은 같은 글자다. 이는 중국에서 청나라 옹정제(1678~1735) 때 공자의 이름 를 피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낸 글자라고 한다.
 결국 지금의 이름 大邱는 원래의 한자 이름이었던 大丘가 공자님의 이름과 같다는 점, 그리고 공자님과 같은 성인(聖人)의 이름을 아무나 함부로 부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피휘(避諱)’라는 중국인들의 오랜 금기(禁忌)에서 비롯된 일이다.
'휘()’란 천자(天子)나 왕(), 성인(聖人) 또는 윗사람의 이름을 말한다. 따라서 피휘란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글에 적지 않는(피하는) 것이다그래서 중국 역사서에 보면 어떤 단어나 이름을 써야하는데 그 속에 황제나 왕의 이름에 쓴 글자가 들어가게 되는 경우 그 글자 대신 다른 글자를 끌어다 붙인 사례가 줄곧 나온다.
원래 써야할 글자 대신 다른 글자를 씀으로써 뜻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거나 심지어 잘못 전달될지라도 황제나 왕, 또는 성인의 이름에 들어간 글자는 쓰지 않았으니 피휘의 정도(程度)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피휘가 생기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얘기된다. 첫째는 그 대상자의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다. 고귀하신 분이나 웃어른의 이름을 누구나 함부로 불러서는 절대 권위가 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분과 권위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옛날식 사고로 이는 충분히 생기고도 남을 일이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에 대해 나쁜 주술(呪術)을 거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사극(史劇)이나 영화에서 가끔 나오는 것처럼 그 대상자의 이름을 써 붙인 인형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칼을 꽂으며 저주를 퍼붓는 것 같은 일을 막으려는 것이다. 이는 분명 미신적(迷信的)인 성격이 강한 일이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까지도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것이다.
 이 피휘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졌고, 임금이나 성인·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글로 적는 일을 피하는 것이 제도화했다특히 성리학이 국가의 중심 사상으로 뿌리내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유학(儒學)의 창시자인 공자(孔子)’를 최고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렸으니,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적는 것은 엄청난 불경죄(不敬罪)가 됐다. 그래서 대구의 한자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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