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강화도조약 140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과 일본은 1876년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140년전이나 지금이나 치밀하게 준비를 해 그들이 원하는 몫을 챙겼다. 강화도조약 문구를 미리 준비해와 무력시위를 벌이며 조선에게 도장만 찍도록 강요했다. 이번 위안부문제 타결(?)에서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으로 다시는 국제사회에서 위안부를 거론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았다. 주도면밀한 일본, 대책없이 끌려가는 한국,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140년전 일본군이 조선의 뜻과 상관없이 조선땅을 밟은 것처럼 그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까 두렵다.
◇무관세 치외법권 해안탐사 등 일본에 탈탈 털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연무당(훈련 연병장). 조선대표 신헌과 일본대표 구로다는 12개 항목으로 된 강화도조약에 서명했다. 조선은 조약이 뭔지도 모른채 서명했다. 신헌이 조약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일본은 상대국에 관(외교시설)을 열어 통상하는 것이라 답했다. 조선은 그때만 해도 예전처럼 ‘서로 다시 친하게 지내자’는 관계회복으로만 생각했다.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에서는 만국공법(국제법)이 채택되어 각국간 조약체결이 유행이었다. 일본과 중국은 철저히 잇속을 따지는 국제법에 눈을 떠갔다. 조선만 깜깜이었다. 조선은 일본에 무관세, 치외법권, 해안탐사권을 그냥 내줬다. 나중에 후회하고 되돌리려 했지만 일본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강화도 조약을 근거로 일본은 관세없이 무역을 했고, 일본인이 죄를 지어도 조선은 처벌할 수 없었다. 해안탐사란 명목으로 일본 배들이 조선의 해안가를 샅샅이 누벼도 손을 쓸수 없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 한해전인 1875년 운요오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궁지로 몬다. 20여년전 자신들이 미국의 무력에 의해 강제개국한 것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했다. 대포를 쏘아대며 무력시위를 했다. ‘조선은 자주국’임을 조약의 맨 처음에 내세운 것은 조선을 중국과 떼어낸 뒤 자신들의 입맛대로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일본은 뜻이 100% 관철되자 처음과 달리 운요오호 사건에 대해 조선에 일체 따지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환영회가 열렸다. 일본 신문은 ‘나라의 영광’이라고 보도했다.

◇조선, 일본의 인천개항 요구에 굴복
강화도조약에는 3개 항구를 개항하기로 했을뿐 부산외 2곳은 정해지지 않았다. 일본은 러시아 남하를 우려해 원산을 개항지로 요구했다. 일본은 나머지 한곳을 더 찾기 위해 조선 서해안을 이잡듯이 뒤진다. 목포 군산 아산 화성 인천(당시 제물포) 강화 등을 해양탐사라는 명목으로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때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초대 주일공사가 된 하나부사 요시모토다. 그는 처음 인천이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항구가 협소해 제물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양과 가깝고 육로로도 접근할 수 있음을 간파해 인천을 개항지로 끈질기게 요구한다. 절대 안된다고 버티던 조선은 결국 굴복해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한다.
강화도 조약 협상중에도 일본 군함은 제물포를 측량했다. 그 지도가 1876년 6월 29일 일본국 해도번호 제71호로 발행됐다. 지도에는 월미도 위치과 나침판 편각, 제물포 조수간만차(37척 9촌)등이 기록됐다. 일본의 주도면밀함이 놀랍다.

◇언제나 미국은 일본편
1800년대 말 국제 역학관계를 간파한 일본은 당시 세계 최강국인 영국과 떠오르는 신진세력 미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1902년 영일동맹을 맺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다. 러일전쟁 승리후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테프트 조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챙기기로 한다. 조선은 그것도 모른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가 조선을 방문하자 그녀에게 매달리고 외교전을 펼친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묵인아래 조선침략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번 일본 평화헌법 개정에도 미국은 사실상 동조했다. 위안부 문제에도 미국이 압력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다아는 사실이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 동맹을 공고히 해 중국의 위협에 대비한다는 구상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 틈에 끼어있는 대한민국의 운명은 항상 바람앞의 등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