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영종 예단포서 3년간 유배 생활했던 독립운동가 계봉우
인천 영종 예단포서 3년간 유배 생활했던 독립운동가 계봉우
  • 이경현 기자
  • 승인 2023.08.1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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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러시아 중국 등서 독립운동 펼친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

 

법무부의 독립유공자 국적 수여식.

역사를 노래한 민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계봉우(1880~1959) 선생을 아시나요. 법무부는 지난 7일 광복회관에서 광복절 78주년 기념 독립유공자 후손 대한민국 국적 수여 증서식을 열고 계봉우 선생 후손 등 20명에게 대한민국 국적 증서를 줬다.
계봉우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16년부터 3년 인천 영종도 예단포에서 유뱅생활을 했다. 유배 중 예단포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계봉우 선생의 생활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0년 함경남도 영흥 출신인 계봉우는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였다. 그는 1910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911년 초 북간도로 망명하여 광성학교에서 국사와 국어를 가르치며 『조선역사』·『국어』·『조선지리』 등 교과서 편찬 및 간도 전역에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1916년 일본 경찰대에게 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인천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 1919.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북간도 대표 의원으로 부임했다

계봉우 선생.

1920년에는 '뒤바보'와 '사방자‘라는 필명으로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아령실기」·「의병전」 등 주목할 만한 민족운동 관련 저술을 「독립신문」에 발표했다. 1920.10월 이후 치타 극동 공화국 극동부 내의 한인부에서 활동하다가 1921.6월 자유시참변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수모를 겪었다.
1921년 11월 출옥한 그는 한글잡지인 『새사람』의 주필로 활동했다. 1923년 초등학교용 역사교과서 발행, 블라디보스톡 노동학원에서 대한문전 등 한국어 교육하였고, 1930년에 중학교용 교과서 편찬 후 하바로프스크 대학에서 모국어를 강습하였으며, 각종 역사서를 저술했다.

1937년 소련 내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광복 후 북한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22년 동안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모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며 「조선문학사」, 「조선문법」 등 서적을 집필했다. 이후 한국,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등 4개국을 망명하며 한반도 주변 정세와 망명 한인들의 삶에 대한 중요한 연구 자료를 남겼다.

1959년 세상을 떠났으며 계봉우 선생 유해는 카자흐스탄에 묻혔다. 2019년 정부는 유해를 봉환해 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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