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넘쳐나는 인천..."역사적 가치 높이자" 아우성
'한국 최초' 넘쳐나는 인천..."역사적 가치 높이자" 아우성
  • 이두 기자
  • 승인 2016.06.15 1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첫회는 1897년 지어진 답동성당... 100년 넘은 개항 역사 고스란히 간직

 

개항 13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답동성당.

인천은 1883년 개항했다. 외국의 근대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그래서 인천에는 ‘한국 최초’가 많다. 호텔ㆍ등대ㆍ철도ㆍ공원ㆍ짜장면ㆍ기상대 등 헤아릴 수 없다. 인천시가 인천의 가치를 높이겠다며 최초의 유적과 기록들을 널리 알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천시민들은 인천의 가치 창조에 별관심이 없다. 시민의 관심을 이끌어낼 묘수가 필요하다.
​  ‘인천최초, 한국최초’를 시리즈로 싣는다. 첫 번째는 인천 답동성당이다.
1886년 한국과 프랑스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가장 큰 의미는 조선에서의 선교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천주교는 오랫동안 조선에 발을 붙일 수 없었으며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 선교가 가능해지자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는 조선에 신부를 파견했다. 1889년 7월 1일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Wilhelm,J.) 신부가 인천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답동성당(당시 제물포성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비록 임시로 예배를 드릴 공간을 마련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1주일 후 84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미사를 봉헌했다.
​ 

1937년 완공당시의 답동성당.

답동성당은 1889년 설립됐으나 성당이 건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빌렘 신부가 답동 언덕 일대의 땅을 기증 받아 1890년 정초식을 거행했고, 제2대 르비엘(Leviel,E) 신부가 성당 건립 비용을 마련해 경리부 건물 1동을 건립하면서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 1894년 코스트(Coste,E.J.G)와 샤르즈뵈프(Chargebeouf) 신부가 성당의 기초 설계도를 그리고 1895년 8월 공사를 착수해 1897년 7월 완공했다. 당시 종탑은 교회의 상징물이었으나 종이 설치된 것은 성당이 완공된 3년 뒤인 1900년의 일이었다.
​  신도가 급격히 증가하자 제4대 신부인 드뇌(Deneux,E) 신부는 성당 증축 공사를 시행해 4년 2개월 만인 1937년 6월 완공했다. 그 후에도 몇 번의 개축공사가 있었으나 비교적 옛 모습이 현재까지 보존돼 왔다.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  답동성당은 유럽의 마을 성당을 떠올리게 한다. 로마네스크양식으로 3개의 종탑이 있으며 평면은 십자가 모양이다. 자연석을 주로 사용한 서양식 성당과 달리 돌과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주요 부분에는 하얀 화강암을 사용해 치장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